letter

새 글을 메일로 받아보세요

한 달에 한 번, 그달의 글을 추려 보내드립니다.

메일로 구독하기
천하제일 AI 로또 대회

LIFE/AI 시대의 삶

천하제일 AI 로또 대회

오래된 친구들이 모인 단톡방에 이번 주 로또 번호를 각자 쓰는 AI에게 받아보자는 제안이 올라왔습니다.
 
“AI한테 로또 번호를 물어본다고? 진짜 멍청한 생각이네 ㅋㅋ 당장 하자.”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지만, AI에게 업무도 묻고, 건강도 묻고, 고장 난 물건을 고치는 법까지 묻는데 로또 번호라고 못 물어볼 이유는 없어 보였습니다. 곧 50대를 바라보는 저와 친구들은 이 놀라운 발상에 어린애들처럼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로또가 무작위 추첨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저도 매주 5천 원씩 사면서 당첨 확률이 얼마나 낮은지 여러 번 확인했습니다. 그렇다고 그 낮은 확률이 구매를 중단하는 데 도움을 준 적은 없습니다.
 
단톡방의 대화는 오랜만에 열기를 띄기 시작했습니다. 한 친구가 먼저 자신의 질문과 AI의 답을 캡처해서 올렸습니다.
 
"당첨 보장은 할 수 없습니다. 제가 고른 번호는 다른 모든 6개 조합과 당첨 확률이 똑같습니다. 로또 6/45 1등 확률은 8,145,060분의 1입니다. 번호는 재미로 골라드린 것이고, 투자 판단처럼 믿고 금액을 늘리시면 안 됩니다."
 
로또 번호는 예측할 수 없으며, 추천받은 숫자가 당첨 가능성을 높여주지 않는다는 설명이 화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말이 왜 이렇게 많아. 번호만 달라니까.”
다른 친구는 질문을 너무 성의 없이 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역대 당첨 번호와 최근 출현 빈도를 분석하도록 시켜야 의미가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곧바로 반론이 나왔습니다.
“무작위라며. 뭘 분석해.”
“그래도 그냥 뽑는 것보다는 낫지.”
“뭐가 나은데?”
“기분이.”
 
이쯤에서 대화가 끝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질문은 점점 길어졌습니다. 최근 몇 년의 번호를 분석하고, 연속된 숫자는 피하고, 홀수와 짝수를 적당히 섞고, 사람들이 많이 선택할 법한 조합은 제외해달라는 조건이 붙었습니다. 한 친구는 여러 AI에게 같은 질문을 한 뒤 겹치는 숫자를 고르겠다고 했습니다. 다른 친구는 유료로 쓰는 AI의 답을 일부 올리면서 무료로 받은 번호와는 다를 거라고 주장했습니다. 돈을 내고 받은 번호이니 최소한 5천원은 당첨될 거라는 터무니없는 소리였습니다.
 
AI는 계속 당첨을 보장할 수 없다고 했고, 친구들은 보장까지 바란 적은 없다며 숫자만 내놓으라고 재촉했습니다. 저도 AI에게 번호를 부탁했습니다. 길게 붙은 주의사항을 읽다가 다시 물었습니다.
“당첨 보장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어. 이번 주에 살 번호 여섯 개만 골라줘.”
숫자가 나왔습니다. 낮은 숫자와 높은 숫자가 적당히 섞였고, 홀수와 짝수의 수도 비슷했습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는데 숫자가 가지런해 보인다는 것만으로 신뢰가 갔습니다. 로또 번호에서 가지런함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평소처럼 5천 원어치를 사면서 한 줄은 AI가 추천한 번호를 그대로 적었습니다. 나머지는 자동으로 돌렸습니다. AI를 믿었다고 말하기에는 한 줄뿐이었고, 믿지 않았다고 하기에는 실제로 천 원을 썼습니다.
친구들도 각자 복권 사진을 단톡방에 인증하기 시작했습니다. 코웃음이 나오는 사실은 번호만은 공개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자신의 AI가 실제로 당첨 번호를 찍어줬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토요일 추첨 시간이 가까워지자 평소 조용하던 단톡방에 친구들이 모였습니다. 친구 한 명이 방송 화면을 보며 번호를 중계했고, 숫자가 하나씩 나올 때마다 메시지가 연달아 올라왔습니다.
“하나.”
“나는 아직 없음.”
“나도.”
“이거 지난주 방송 아니야?”
추첨이 진행될수록 대화가 점점 줄었습니다.
결국 AI에게 맡긴 인생 역전의 꿈은 아무도 이루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 한 친구가 번호 두 개 맞혔으니 자기가 쓴 프롬프트가 다른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아무것도 맞히지 못한 친구는 AI가 번호를 고른 방식부터 잘못됐다고 했습니다. AI 추천 번호가 38인데 당첨 번호가 37이니 거의 맞혔다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로또에는 거의 맞힌 사람에게 주는 상금이 없습니다.
 
각자 한두 개의 숫자가 부분적으로 맞았고, 복권을 산 돈은 사라졌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최신이라는 기술을 불러 모아 오래된 행운을 부탁했지만, 결과는 평소 자동으로 산 번호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은 각자 숫자를 고른 방식의 문제점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표본이 너무 컸다는 녀석도 있었고, 최근 회차에 가중치를 줬어야 한다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AI의 첫 번째 답을 쓰지 말고 여러 번 질문한 뒤 골랐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실패한 것은 AI의 예측이지, 로또 번호를 AI에게 묻는 발상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단톡방이 잠잠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 한 명이 다시 물었습니다.
“다음 주에는 프롬프트를 통일해서 해볼까?”
 
아무도 그만하자고 하지 않았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