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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에게 실망감을 느꼈다

WORK/AI 시대의 일

AI에게 실망감을 느꼈다

제안서를 만들다 보면 스스로 봐도 꽤 잘 나온 것 같은 장표가 있습니다. 논리가 무리 없이 이어지고, 복잡했던 생각이 한 장 안에 정리되면서, 도식도 예상보다 말끔하게 나왔을 때입니다.

이럴 때는 다른 사람에게 한번 보여주고 싶어집니다. 다만 “이거 잘 만들지 않았어?”라고 묻기에는 제가 나이도 있고, 사회적 지위와 체면도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자신 없는 사람처럼 말합니다.

“이 장표, 조금 불안한 부분이 있는데, 냉정하게 평가 좀 해줄래?”

오늘도 비슷한 마음으로 AI에게 제안서 한 페이지를 건넸습니다. 장표만 보면 맥락을 놓칠 수 있으니 발주처의 RFP도 함께 넣었습니다. 칭찬만 해달라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요구 사항을 벗어난 부분이 있는지도 냉정하게 확인해달라고 덧붙였습니다.

속으로 기다린 답은 따로 있었습니다. 전체적인 방향은 설득력이 있고, 정해진 타깃을 상황과 동기에 따라 한 단계 더 세밀하게 해석한 부분이 좋다는 정도의 답이랄까. 낯간지럽긴 하지만 기분은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AI의 답은 제가 예상한 순서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발주처의 요구사항에 따르면 제공한 STP를 고정된 출발점으로 두고, 대안적인 재설계는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챕터 전체의 프레임이 RFP 위반으로 받아들여질 리스크가 있다는 내용부터 나왔습니다. STP는 시장을 나누고, 그중 목표 고객을 정한 뒤, 그 고객에게 제품을 어떻게 인식시킬지 설계하는 기본 틀입니다. 발주처는 이미 이 작업을 마쳤고, 새로운 틀을 제안하지 말라고 선을 그어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그 위에 상황과 맥락을 한 겹 더 얹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타깃을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보완이었고, AI가 보기에는 금지된 재설계로 읽힐 만한 구조였던 모양입니다.

“이건 세그먼트를 신규로 설정하는 게 아니라 타깃 설정을 더 정교하게 하기 위해 컨텍스트 기반의 레이어를 한 겹 덧씌운 거야.”

기존 STP를 대체하지 않고, 타깃이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구체화하는 것이라고 설명을 보탰습니다. 챕터의 목적도 분류 체계를 새로 만드는 데 있지 않고, 이미 주어진 타깃을 실행 가능한 수준으로 해석하는 데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말이 길어질수록 제 의도를 명확히 한다기보다 점점 궁색한 변명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것을 저도 느꼈습니다.

AI는 제 의도를 이해한다고 했습니다. 다만 평가자가 그 레이어를 새로운 세분화 기준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은 남아 있고, 현재의 챕터명과 구조가 RFP의 제한을 넘어선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고 답했습니다.
이해는 했지만 무죄를 선고하지는 않은 겁니다.

조금 섭섭했습니다. AI에게 검토를 부탁했고, AI는 시킨 일을 했습니다. 발주처의 RFP와 장표를 비교해서 위험을 찾았고, 평가자가 오해할 가능성까지 짚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제안서를 검토하는 상황이었다면 꽤 유용한 답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제 장표를 두고 그런 말을 하니 맥락을 충분히 읽지 못한 판단처럼 느껴졌습니다. 새로운 세그먼트를 만드는 일과 기존 타깃을 맥락별로 구체화하는 일이 얼마나 다른지 다시 설명하고 싶었고, 이 정도 확장은 전략 제안에서 흔히 허용된다고 설득하고 싶었습니다.

반박을 더 쓰려다가 손을 멈췄습니다. 제가 원한 것은 냉정한 검토가 아니었습니다. 잘 만든 장표를 은근히 자랑하고 싶었는데, 칭찬을 직접 요구하기가 민망해서 검토를 부탁하는 모양을 취했을 뿐입니다.
AI에게는 체면을 차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람처럼 눈치를 봐주기를 기대했습니다.
“냉정하게 봐줘”라는 말 뒤에 “그래도 먼저 좋은 점을 말해줘”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제가 이 장표에 애착을 갖고 있다는 점까지 고려해주기를 바랐습니다. AI는 그런 사정을 살피지 않았습니다. 냉정하게 보라고 했으니 냉정하게 봤고, RFP 위반 가능성이 눈에 띄니 그것부터 말했습니다.
객관적인 검토를 원한다고 해놓고, 그 객관성이 제 쪽으로 향하자 갑자기 공감이 필요해진 겁니다.
"너 T야?" 라고 대화창에 적을 뻔 했습니다.

장표를 다시 열어봤습니다. 챕터를 통째로 버릴 생각은 없었지만, AI의 답변이 전혀 근거 없다고 하기도 어려웠습니다. 발주처가 STP 재설계를 원하지 않는다고 적어둔 상황에서, 제가 만든 도식이 새로운 세그먼트 분류처럼 보일 여지는 있었습니다. 결국 챕터 제목을 바꾸고 설명 문구를 손봤습니다. 기존 STP를 대체하는 프레임이 아니라, 주어진 타깃을 상황별로 구체화하기 위한 보완 장치라는 점을 먼저 밝혔습니다. 도식의 일부 표현도 분류처럼 보이지 않도록 조정했습니다. 수정한 뒤 다시 보니 전보다 안전해졌고, 제가 하려던 말의 의도도 크게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AI의 지적이 도움이 되긴 했습니다. 

그래도 답변 창을 닫기 전, 혹시 아래쪽에 이 장표의 장점이나 제 의도와 해석을 칭찬한 부분이 있나 한 번 더 내려봤습니다. 

없었습니다.

AI에게 실망감을 느꼈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