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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는 비상등이 했습니다

LIFE/일상의 기록

사과는 비상등이 했습니다

비상등을 자주 켜는 편입니다.
차선을 바꾸면서 뒤차가 속도를 줄여줬다면 서너 번 깜빡입니다. 여유 있게 들어갔을 때는 고맙다는 뜻이고, 간격이 넉넉하지 않은데 들어갔을 때는 미안하다는 뜻입니다. 앞차가 갑자기 멈춰 저도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으면 뒤차에 알리려고 비상등부터 켭니다.

아내는 제가 비상등을 너무 많이 쓴다고 생각합니다. 운전이 험하다는 부산에서 운전을 배워서 그런지, 무리 없이 차선을 바꿨다면 굳이 비상등까지 켤 필요는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내가 운전할 때 차선을 바꾼 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제가 조수석에서 손을 뻗어 비상등을 눌러주기도 합니다. 운전은 아내가 하고, 뒤차와의 관계는 제가 관리합니다. 이것도 나름 부창부수라고 할 수 있겠지요.

반대 상황도 있습니다. 앞차가 갑자기 끼어들어 브레이크를 세게 밟았는데도 비상등 한 번 켜지 않으면 욕이 나옵니다. 앞차 운전자는 들을 수 없는데, 상대의 몰상식함을 지적하겠다며 저도 전달되지 않는 몰상식한 행동을 합니다.

그런데 같은 식으로 들어온 차가 비상등을 오래 켜고 있으면 욱하던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놀라기는 했지만, 앞차의 비상등이 깜빡이면 방금 제가 겪은 일에 상대도 미안함을 느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무리하게 들어왔습니다. 미안합니다.


그 정도의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비상등은 사과라고 하기에는 너무 짧습니다. 잘못을 바로잡지도 못하고 손해를 갚아주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적어도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고 있다는 표시를 남깁니다.

저는 그 표시가 없는 차에 더 화가 납니다. 위험하게 끼어든 일도 싫지만, 그 뒤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달리는 모습이 더 얄밉습니다. 제가 놀라고 위협을 느꼈다는 사실이 그 운전자에게는 아예 없었던 일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부드럽게 들어온 차가 비상등을 켜면 별일도 아닌데 마음이 좋아집니다. 양보를 알아봤다는 뜻 같아서입니다. 앞차 운전자의 얼굴도 모르고 다시 만날 일도 없지만, 불빛이 서너 번 깜빡이는 동안에는 예의 있는 사람을 만난 기분이 듭니다.

회사나 집에도 그런 버튼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퇴근할 시간이 다 되어 파일을 보내면서 오늘 중으로 봐달라고 했을 때, 상대가 밤늦게 결과를 보내오면 감사하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부탁한 일이 무리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표시가 하나 더 필요합니다.
집에서도 말을 세게 한 뒤 화제가 바뀌어버리면 다시 꺼내 사과하기가 어색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지나가면 상대만 그 말을 들은 채 남습니다. 그럴 때 서너 번 깜빡일 수 있다면 편할 것 같습니다.

방금 제가 무리했습니다.
당신이 받아준 것도 알고 있습니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그 정도는 전할 수 있을 테니까요.
물론 그런 버튼이 생기면 남용할 가능성이 큽니다. 무리한 부탁을 한 뒤 버튼을 누르고, 말을 세게 한 뒤 또 누를 겁니다. 미안함은 느끼되 행동은 그대로일 수도 있습니다. 도로에서도 위험하게 들어온 뒤 비상등만 켜면 괜찮다고 여기는 운전자가 있는 것처럼요.

아내가 제 비상등을 못마땅해하는 이유도 비슷할 겁니다. 서너 번 깜빡이는 일보다 애초에 그 버튼을 누를 상황을 줄이는 게 먼저라는 뜻이겠지요. 그래도 저는 누르지 않는 것보다는 누르는 쪽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상황을 줄이지 못했다면, 적어도 제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알고 있다는 표시라도 남겨야 합니다.

회사와 집에 그런 버튼이 생기면 저는 아마 마르고 닳도록 눌러댈 겁니다.
사과할 일을 줄이지는 못하고, 사과하는 데 부지런한 사람이라서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