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플뮤직에 나만을 위한 추천이라는 목록이 있습니다.
어느 날 별생각 없이 틀어봤는데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습니다. 일 때문에 듣는 K-Pop이나 요즘 많이 나오는 음악도 섞여 있었지만 제가 원래 좋아하는 장르의 노래가 제법 많았습니다.
처음 듣는 곡들도 괜찮았습니다. 제가 어떤 음악을 반복해서 들었는지 분석해서 골랐을 수도 있고, 예전에 한두 번 지나친 곡과 비슷한 것을 찾아줬을 수도 있습니다. 원리는 잘 모르겠지만 틀어두면 크게 거슬리는 곡이 없었습니다.
1시간 30분짜리 플레이리스트가 마음에 들어서 재생이 끝나자마자 다시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듣다가 이런 노래가 있었나 싶었습니다.
분명 방금 들었던 플레이리스트인데 몇 곡은 처음 듣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별로여서 흘려들었던 것도 아닙니다. 다시 들어도 좋았습니다.
내가 기억력이 많이 안 좋아졌나.
최근에는 이런 생각을 종종 합니다.
브런치에서도 제 추천 목록에 뜬 글을 읽다가 그날따라 마음에 깊이 와닿는 글이 있었습니다.
마음에 들어 라이킷을 누르려 했는데 이미 눌러져 있었습니다.
전에 읽었다는 뜻인데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읽으면서도 좋다고 생각했으니 별 관심 없이 넘긴 글이 아니었을 겁니다.
어떻게 한 번 읽고 라이킷까지 누른 글을 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을까요.
좋아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는데 읽었던 기억은 사라졌습니다.
귀신 곡할 노릇이란 게 이런 때 쓰는 말 같습니다.
어느 날 밤 쇼핑몰을 보다가 식기세척기 세제 광고를 봤습니다. 마침 제가 자주 주문하던 제품이었고, 거의 다 쓴 게 생각나 주문했습니다. 해외 배송이어서 며칠 걸리겠거니 했는데 바로 다음 날 아침에 택배가 도착했습니다. 와 요즘은 해외 배송도 새벽 배송이 되는구나 하면서 크게 감탄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똑같은 세제가 또 왔습니다.
주문 내역을 확인해보니 첫 번째 택배는 열흘 전의 제가 주문한 것이었습니다.
그걸 깨끗하게 잊어버렸나 봅니다. 물류가 발전한 게 아니라 제 건망증이 발전한 겁니다.
슬슬 제 기억력을 의심하게 됐습니다.
예전에는 좋아하는 노래를 다시 들으려면 가수 이름이나 제목이라도 기억해야 했습니다. 음반으로 들었다면 앨범 표지를 봤고, 자주 듣다 보면 어느 곡 다음에 어떤 곡이 나오는지도 자연스럽게 익숙해졌습니다.
요즘에는 제목을 몰라도 계속 들을 수 있고, 마음에 들어서 버튼 하나만 눌러두면 다음에는 서비스가 알아서 비슷한 것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음악은 많이 듣는데 제목을 모르는 곡이 많아졌습니다.
글도 많이 읽는데 어디서 무엇을 읽었는지 기억이 희미할 때가 있습니다.
좋아한 것에는 좋아요가 남고, 본 것에는 기록이 남습니다. 산 물건은 주문 내역에 있고, 들었던 음악은 재생 이력 어딘가에 쌓입니다. 덕분에 잊어도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그 순서가 뒤집힌 것 같습니다. 내가 무엇을 좋아했는지 확인하려고 기억을 더듬는 대신, 앱에 남은 흔적을 보고 아 내가 이걸 좋아했었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애플뮤직에서 처음 듣는 것 같은 노래가 흘러나와도 처음 듣는 곡인지, 이미 여러 번 듣고 좋아했던 곡인지 도무지 자신이 없습니다.
브런치에서 마음에 드는 글을 만나도 라이킷을 했는지 부터 확인해봐야 합니다.
그리고 식기세척기 세제는 당분간 주문하지 않아도 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