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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배속 재생이 되지 않는다

TREND/요즘 사는 법

책은 배속 재생이 되지 않는다

며칠 동안 종이책 한 권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프로젝트 헤일메리>라는 소설책인데 잠깐씩 짬을 내 읽으면서 일주일이 즐거웠습니다.
전자책으로 사면 훨씬 편했을 겁니다. 지하철에서 휴대폰으로도 볼 수 있고 가방도 가벼워집니다. 그런데 가끔 굳이 종이책을 삽니다.

책을 읽을 자리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회사에서 점심시간이 시작되면 책상에 널려 있는 것들을 한쪽으로 밀어냅니다. 집에서는 맥북을 덮고 그 위에 책을 올려놓기도 합니다. 지금부터 30분은 책을 읽겠다고 정해두면 그동안은 메일도, 일도, 다른 생각도 잠깐 미뤄둘 명분이 생깁니다.

어릴 때는 늘 책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지하철에서 서서 책을 읽는 것도 별일 아니었습니다. 버스에서는 곡예라도 하듯이 한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다른 손으로 책을 들었습니다. 지금이라면 몇 정거장 지나지 않아 팔이 아프다고 덮을 것 같은데 그때는 그게 힘든 줄도 몰랐습니다. 심심함보다는 약간의 수고가 더 나았던 시기입니다.

요즘은 이동할 때 종이책을 꺼내지 않습니다. 대신 휴대폰을 봅니다.
지하철에서 전자책을 읽을 때도 있지만 웹툰이나 웹소설을 보고, 결국 숏폼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편하니까요.

숏폼을 보다가 내릴 역이 오면 그냥 끄면 됩니다. 재미가 없으면 바로 다음으로 넘깁니다.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걷는 몇 분이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에도 볼 수 있습니다. 중간에 끊었다는 아쉬움도 거의 없습니다. 자투리 시간과 정말 잘 맞습니다.

그러다 보니 숏폼이 아닌 것까지 같은 방식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긴 드라마도 2배속으로 보고, 소설도 주인공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애먼 일을 붙들고 있으면 예전보다 빨리 덮습니다. 고구마 전개가 너무 길다는 생각부터 듭니다.

숏폼을 많이 보는 것보다 저는 그쪽이 더 신경 쓰였습니다. 긴 이야기를 보면서도 자꾸 짧은 이야기처럼 반응하게 됩니다. 빨리 다음 사건이 나와야 하고, 지금 보는 장면이 곧바로 재미있어야 합니다.
선택지가 많아진 탓도 있고, 하루가 예전보다 피곤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전부 숏폼 탓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도 예전보다 이야기를 기다려주는 시간이 짧아진 건 맞는 것 같습니다.

종이책을 펼치면 그 습관이 금방 드러납니다. 책은 2배속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몇 페이지를 넘길 수는 있지만 그러면 무엇을 건너뛰었는지 압니다. 대충 읽으면 다음 문장에서 막히고, 머리가 다른 생각을 하는 동안 눈만 움직였다면 다시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책이 제 속도에 맞춰주지 않습니다. 제가 책의 속도로 내려가야 합니다.
물론 종이책이라고 늘 잘 읽는 것은 아닙니다. 몇 페이지 읽다가 덮는 날도 많고, 휴대폰이 생각나서 괜히 화면을 한 번 켜볼 때도 있습니다. 예전보다 긴 소설 한 권을 끝까지 따라가는 일이 어려워졌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자리를 마련하게 됐습니다.
책상 위에 책을 한 권 올려놓습니다. 당장 재미있는 장면이 나오지 않아도 잠깐은 그냥 읽기로 합니다.

어느새 버릇이 들어버린 저의 콘텐츠 소비 습관을 바꾸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도 모든 이야기를 그런 속도로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끔은 이야기가 넘어가는 속도를 마음대로 높일 수 없는 곳에 있고 싶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책을 펼치기 전에 책상부터 치웁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