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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잉크는 종이를 흉내 내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 전자책 리더기가 사라지지 않은 이유

TREND/기기와 경험

전자잉크는 종이를 흉내 내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 전자책 리더기가 사라지지 않은 이유

전자책 리더기라는 카테고리에 대하여

이전 PDA 글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저는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책도 문학, 비문학 가리지 않고, 글이라면 다 좋아합니다. 당연히 읽는다는 행위 자체를 위한 디지털 디바이스인 전자책 리더기도 저에게 의미 있는 기기입니다.

 

저는 아이리버 스토리로 처음 전자잉크 화면을 경험했고, 몇 년이 지나 리디페이퍼를 샀습니다. 또 몇 해 전에는 오닉스 포크 3를 구입했습니다. 그 사이사이 스마트폰이 저의 읽는 욕구를 채워줬죠. 돌아보면 저는 전자책 리더기를 꾸준히 써온 사람이라기보다, 몇 번이나 기대했다가 멀어지고, 다시 돌아온 사람에 가깝습니다.

 

전자책 리더기는 이상한 위치에 있는 기기입니다. 스마트폰처럼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태블릿처럼 다목적 기기가 되지도 못했습니다. 누구나 하나씩 들고 다니는 필수 기기가 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다시 눈에 들어옵니다.

 

종이 같은 화면이라는 첫인상

전자잉크 기술 자체는 1990년대 MIT 미디어랩에서 시작됐고, 2004년 소니 리브리에가 첫 상용 전자잉크 리더기로 출시됐습니다. 그러다 2007년 아마존 킨들 1세대가 등장하면서 전자책 리더기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렸습니다. 한국에는 좀 늦게 들어왔고, 2009년 아이리버 스토리가 출시됐습니다. 제가 처음 만난 전자책 리더기였습니다.

 

아이리버 스토리를 처음 만났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기능이 아니었습니다. 화면의 질감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종이 질감을 디지털 화면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이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 LCD 화면과는 분명히 달랐습니다. 눈앞에서 빛을 쏘는 화면이 아니라, 종이 위에 글자가 얹혀 있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전자잉크가 종이처럼 느껴졌던 이유는 단순한 기분 탓만은 아닙니다. LCD나 OLED는 화면 뒤에서 빛을 쏘거나 화소 자체가 빛을 내는 방식입니다. 반면 전자잉크는 전기 신호로 미세한 입자의 위치를 바꿔 글자와 이미지를 표시하는 디스플레이입니다. 화면이 스스로 빛나기보다, 종이처럼 외부 빛을 반사해 읽는 쪽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처음 아이리버 스토리를 봤을 때 느꼈던 종이 같은 질감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기술의 방향이 만든 결과였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해상도나 반응성, 콘텐츠 환경은 부족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때 저는 전자잉크가 다른 종류의 화면이라는 것을 처음 체감했습니다.

 

그때의 전자책 리더기는 미래처럼 보였습니다. 종이책이 언젠가 이런 화면 안으로 들어오겠구나 싶었습니다.

 

가능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자책 리더기는 빠르게 대중화되지 않았습니다. 스마트폰이 먼저 세상을 바꿨고, 태블릿도 등장했습니다. 사람들은 책뿐 아니라 뉴스, 메신저, 영상, 웹서핑, 게임, 쇼핑까지 하나의 화면에서 해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흐름 속에서 전자책 리더기는 조금 애매한 기기처럼 보였습니다. 종이책처럼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은 있었지만, 스마트폰과 태블릿도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전자잉크의 질감은 좋았지만, 기기 하나를 따로 들고 다닐 만큼 충분한 이유가 되는지는 애매했습니다.

 

처음의 신기함만으로는 오래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기술이 자리를 잡으려면 감탄을 넘어 반복 사용의 이유를 만들어야 합니다. 아이리버 스토리가 제게 남긴 것은 전자잉크의 가능성이었지만, 가능성만으로는 하나의 기기 카테고리가 완성되기 어렵다는 사실도 함께 보여줬습니다.

 

카르타 패널이 독서 경험을 바꿨다

그러다 2013년 카르타 패널이 처음 등장했습니다. 아마존 킨들 페이퍼화이트 2세대에 먼저 탑재됐고, 한국 시장에는 2015년 크레마 카르타와 리디페이퍼에 적용되면서 본격적으로 들어왔습니다. 저도 그 시점에 리디페이퍼를 샀습니다.

 

리디페이퍼에서 만족감은 한 단계 올라갔습니다. 제게는 카르타 패널이 주는 선명도와 대비감이 중요했습니다. 전자책 리더기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종이 같은 화면이라는 점 자체가 새로웠다면, 카르타 패널에 와서는 글자의 밀도와 검은색의 깊이, 배경의 밝기가 실제 독서 경험을 크게 바꿨습니다.

 

아이리버 스토리에서 전자잉크의 가능성을 봤다면, 리디페이퍼에서는 전자잉크가 정말 읽을 만한 화면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전의 전자책 리더기가 종이의 경험을 디지털로 옮겨보려는 시도였다면, 리디페이퍼는 그 경험을 꽤 설득력 있는 수준까지 끌어올린 기기였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전자책 리더기가 종이책을 어설프게 흉내 내는 기기가 아니라, 독자적인 화면 경험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종이책과 완전히 같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래 읽기에 편했고, 빛나는 화면을 계속 들여다보는 피로감이 덜했습니다. 무엇보다 글자가 화면 위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화면 안에 차분히 얹혀 있다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다만 리디페이퍼는 플랫폼의 기기이기도 했습니다. 전자책 리더기는 단말기 자체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어떤 서점과 연결되는지, 어떤 책을 살 수 있는지, 구매한 책을 얼마나 편하게 읽을 수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아이리버 스토리가 전자잉크의 첫인상을 남겼다면 리디페이퍼는 전자책이 결국 플랫폼의 경험이라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전자잉크는 화면이고, 플랫폼은 책장입니다. 둘 중 하나만 좋아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카르타 패널의 선명함과 리디라는 전자책 플랫폼의 결합은 처음으로 전자책 리더기를 꽤 완성된 독서 도구처럼 느끼게 했습니다.

 

안드로이드가 전자책 리더기의 경계를 넓혔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났습니다. 한동안 전자책 리더기를 잊고 지냈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도 있었고, 스마트폰과 태블릿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책을 읽고 싶으면 스마트폰으로도 읽을 수 있었고, 더 큰 화면이 필요하면 태블릿이 있었습니다. 굳이 전자책 리더기를 따로 들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 사이 전자책 리더기 시장에서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오닉스(Onyx)가 2010년대 후반부터 안드로이드를 OS로 탑재한 전자잉크 리더기를 본격적으로 출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20년에 포크 3가 나왔습니다. 저는 2021년에 이 기기를 샀습니다.

 

오닉스 포크 3에서 달라진 것은 화면만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카르타 패널이 주는 선명함과 종이 같은 질감은 여전히 좋았습니다. 하지만 더 크게 느낀 변화는 안드로이드 기반의 범용성이었습니다.

 

예전 전자책 리더기는 특정 서점과 강하게 묶인 단말기라는 인상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장점이기도 했습니다. 구매와 독서 경험이 단순해지니까요. 하지만 동시에 내가 읽을 수 있는 책과 플랫폼이 제한된다는 느낌도 있었습니다.

 

오닉스 포크 3는 그 경계를 느슨하게 만들었습니다. 안드로이드를 OS로 탑재하면서 리디뿐 아니라 네이버 시리즈나 카카오페이지 같은 앱을 사용할 수 있었고, ePub 파일을 구매하거나 관리할 수 있는 경로도 넓어졌습니다. 전자책 리더기가 특정 서점의 단말기에서 여러 독서 플랫폼을 담는 기기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때 전자책 리더기의 성격이 조금 바뀝니다. 종이책을 대체하는 기기에서, 디지털 독서 환경을 정리하는 기기로 이동합니다. 전자잉크라는 화면 위에 리디, 네이버 시리즈, 카카오페이지, ePub 파일, 웹 기반 콘텐츠가 함께 올라옵니다. 화면은 종이를 닮았지만, 그 안에서 움직이는 콘텐츠 유통 구조는 완전히 디지털입니다.

 

저는 이 지점이 전자책 리더기의 두 번째 진화라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진화가 화면의 진화였다면, 두 번째 진화는 플랫폼의 진화입니다. 아이리버 스토리에서 종이 같은 화면의 가능성을 봤고, 리디페이퍼에서 카르타 패널의 가독성을 경험했다면, 오닉스 포크 3에서는 전자책 리더기가 특정 플랫폼을 넘어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봤습니다.

 

느린 화면이 아니라 다른 기준의 화면

최근의 전자잉크 패널 흐름을 보면 이 변화는 더 분명해집니다.

2023년 발표된 카르타 1300이나 비슷한 시기의 칼레이도 3 같은 패널은 전자잉크의 약점으로 여겨졌던 잔상과 전환 속도를 계속 개선하고 있습니다. 카르타 1300은 흑백 전자종이의 응답성과 잔상 문제를 줄이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고, 칼레이도 3는 전자잉크 위에 컬러 필터를 얹어 색을 표현합니다. 전자잉크는 더 이상 흑백 텍스트만 조용히 넘기는 화면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물론 전자잉크가 LCD나 OLED처럼 영상을 즐기기 위한 화면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유튜브를 볼 수 있다는 것과, 유튜브를 보기 좋은 화면이라는 것은 다릅니다. 이 차이는 분명히 봐야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전자잉크를 오래된 흑백 독서 화면으로만 보는 것은 더 이상 정확하지 않습니다.

 

래서 저는 전자잉크를 느린 화면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제는 조금 낡은 표현처럼 느껴집니다.

전자잉크는 느린 화면이 아니라 다른 기준의 화면입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이 더 밝고, 더 빠르고, 더 많은 것을 보여주는 방향으로 발전했다면, 전자잉크는 읽는 행위에 맞는 화면을 만들기 위해 발전해왔습니다. 가독성, 저전력, 반사형 화면, 긴 독서 시간, 잔상 개선, 컬러 표현, 플랫폼 확장성. 이 요소들이 조금씩 쌓이면서 전자책 리더기는 처음과 다른 기기가 되었습니다.

 

책을 읽을 때 화면은 반드시 빠를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선명해야 합니다. 눈이 덜 피곤해야 합니다. 오래 들고 있어도 부담이 적어야 합니다. 배터리가 오래가야 합니다. 읽는 행위가 자연스럽게 이어져야 합니다. 전자잉크는 그 기준에서 진화해왔습니다.

 

주류가 아니어도 살아남는 법

돌아보면 전자책 리더기는 실패한 미래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스마트폰처럼 폭발적으로 세상을 점령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조용히 자기 자리를 찾아온 기기에 가깝습니다.

 

스마트폰은 거의 모든 기기를 흡수했습니다. MP3 플레이어, 디지털카메라, 전자사전, 내비게이션, PDA가 스마트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책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만 있으면 전자책을 읽는 데 기술적으로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전자책 리더기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스마트폰보다 더 강력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스마트폰과 다른 기준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스마트폰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기기라면, 전자책 리더기는 읽는 일에 맞춰진 기기입니다. 더 많은 기능이 아니라 더 분명한 용도, 더 강한 성능이 아니라 더 적합한 경험을 선택했습니다.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주류가 아닌 기기가 살아남는 방식은 스마트폰을 정면으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스마트폰이 너무 넓게 가져간 기능들 사이에서, 특정한 행위를 더 정확하게 수행하는 것입니다. 전자책 리더기는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없어서 부족한 기기가 아니라, 모든 것을 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역할이 선명해진 기기입니다.

 

2009년 아이리버 스토리에서 처음 본 전자잉크는 신기한 화면이었습니다. 2015년 리디페이퍼의 전자잉크는 책에 가까운 화면이었습니다. 2021년 오닉스 포크 3의 전자잉크는 여러 플랫폼을 담는 독서 화면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전자잉크는 다시 한 번 다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화면은 반드시 더 빠르고 더 밝아져야만 발전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더 오래 읽히기 위해, 다른 방향으로 진화할 수도 있는 것일까요.

전자책 리더기가 사라지지 않은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전자잉크는 뒤처진 화면이 아니라, 읽기라는 행위에 맞춰 다른 길을 선택한 화면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스마트폰 이후의 기기들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도 보여줍니다.

더 많은 기능을 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경험을 더 잘 만드는 것.

 

어쩌면 전자책 리더기는 주류가 되지 못한 기기가 아니라, 주류가 아니어도 살아남는 방법을 먼저 보여준 기기일지도 모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