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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잘하는 일로 나를 설명할 수 없을 때

WORK/AI 시대의 일

내가 잘하는 일로 나를 설명할 수 없을 때

요즘 실존주의라는 말이 자꾸 눈에 들어옵니다.
철학을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제 개인적인 고민에 대한 해답이, 거기 있을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AI에게 질문을 던지고, 꽤 괜찮은 답을 받았습니다.
일에 대한 조언도 받고, 글의 구조도 잡고, 막힌 문장도 풀었습니다. 어떤 날에는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을 AI가 저보다 먼저 정리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편했고, 실제로 도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가끔 허전했습니다.

 

이 답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리고 이 답을 받아든 나는 누구인가.

 

AI는 원인이 아니라 증폭 장치다

AI를 만악의 근원으로 지목하면 편하지만, 논의는 거기서 끝나버립니다. 다 같이 러다이트 운동이라도 일으켜야겠죠.

하지만 현대사회는 이미 오래전부터 사람을 최적화 가능한 대상으로 다루고 있었습니다. 더 효율적으로 일하고, 더 합리적으로 소비하고, 더 높은 성과를 만들고, 더 매력적으로 자신을 소개해야 합니다. 돈은 단순한 교환 수단을 넘어 삶의 성적표처럼 보이고, 시장가치는 사람의 존재감을 대신합니다.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지원자를 만나기 전에 이력서의 경력과 숫자와 연봉을 보고, 지레짐작한 채로 면접을 진행합니다. 변명하자면 경험적 통계에 기반한 판단이고, 제가 속한 시스템이 요구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런 사회에서 인간은 자주 허전해집니다. 삶 자체는 어떨지 모르지만, 나라는 존재는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그 빈자리에 AI가 들어왔습니다.
AI는 위로하고, 조언하고, 내가 미처 찾지 못한 관점까지 제시해줍니다. 어떤 면에서는 작은 구루처럼 작동합니다. 예전에는 책, 선배, 상담실, 종교, 철학 앞에 가져갔을 질문을 이제는 AI 대화창 앞에 가져갑니다. 

 

뭘 해야 할까, 이 선택이 맞을까, 나는 왜 이렇게 불안할까.

 

AI는 대체로 답을 줍니다. 그래서 가끔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답이 너무 매끄러워서 괴로워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문장은 정돈되어 있고, 조언은 합리적이며, 위로는 부드럽습니다. 그런데 그 매끄러운 답이 제 삶의 울퉁불퉁한 맥락을 반영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객사가 칭찬한 것은 하필 AI의 전략이었다

올해 초 제안서를 쓰면서 실험을 하나 했습니다.

작년까지 AI의 역할은 리서치 보조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RFP와 고객사 현황을 정리해 넣고 전략까지 요구해봤습니다.

대부분은 그럴듯한 수준에 그쳤지만, 하나는 22년차 기획자인 제가 보기에도 납득이 됐습니다.

저는 그 전략을 세 가지 방향 중 하나로 넣고, 실행 계획을 직접 채웠습니다.

 

그런데 발표가 끝나고 고객사가 칭찬한 전략은 하필 그것이었습니다. ‘저희 상황을 깊이 이해하고 제안해주신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저는 약간 일그러진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던 것 같습니다. 

이 제안서는 내가 쓴 것인가, AI가 쓴 것인가. 그 질문보다 먼저 제 가슴을 때린 건 더 단순한 선고였습니다.

‘밀렸다.’

 

저는 제가 무엇을 선택했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고객사가 칭찬한 것은 저의 선택이 아니라 결과물이었습니다. 그 전략을 골랐다는 사실이 제게는 중요했지만, 고객사는 그 문장이 어디서 왔는지보다, 지금 이 상황에 맞는지를 봤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남는가.

 

AI가 전략의 선택지를 만들고, 제가 고르고, 다시 제가 실행 계획을 채웠다면 그 일은 제 일일까요. 아니면 저는 AI가 만든 가능성 중 하나를 고른 관리자일까요. 더 불편한 것은, 어쩌면 시장은 그 차이에 별 관심이 없다는 점입니다.

사실 이 질문은 AI가 등장해서 처음 생긴 것은 아닙니다. 

짧지 않은 시간 직장생활을 하면서 비슷한 질문을 오래전부터 해왔습니다.

내가 쓴 문장은 내 생각인가, 고객사의 요구사항인가, 상사의 방향인가, 시장의 언어인가. 

현대의 일이란, 이미 오래전부터 개인의 순수한 본질 같은 것을 흐릿하게 만들었습니다.

AI는 그 흐릿함을 더 선명하게 드러냈을 뿐입니다.

 

제가 실제로 느낀 것은 훨씬 단순했습니다.

 

'이거, 내가 한 일이라고 말해도 되나.'

 

이 질문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문제라기보다, 결과물 앞에서 제가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는가의 문제에 가까웠습니다. AI가 만든 문장과 제가 고른 문장 사이에서, 저는 저작자라기보다 편집자에 가까워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시장은 그 차이를 별로 묻지 않았습니다. 고객사가 본 것은 누가 만들었는가가 아니라, 쓸 만한가였습니다.

 

결국 밀렸다는 자각이 아팠던 이유는, 단지 AI가 좋은 전략을 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제가 잘하는 일로 저를 설명해왔습니다. 문제를 읽고, 구조를 만들고, 말이 되게 정리하는 사람. 그것이 제 직업이었고, 어느 정도는 제 자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능력의 일부가 AI와 겹치는 순간, 일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설명의 문제가 시작됐습니다.

 

내가 잘한다고 믿어온 것이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니라면, 나는 무엇으로 나를 설명해야 할까.

 

선택했다는 말은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아마 그래서 실존주의가 다시 눈에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문장은 철학 교과서 속 문장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AI가 일상에 들어온 뒤에는 더 이상 추상적인 명제가 아니라, 현실의 문장처럼 들립니다. 

나라는 사람의 본질이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무엇으로 나를 설명해야 할까. 

내가 하는 일, 내가 만든 결과, 내가 쓴 문장, 내가 선택한 방향 중 어디까지가 나일까.

그래서 실존주의는 거창한 철학이라기보다, 이 질문 앞에서 제가 도망칠 수 없는 자리를 표시해주는 선처럼 느껴집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혼자 다 만들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렸는가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여기에는 위험도 있습니다.
니체와 사르트르가 다시 읽힌다는 말은 쉽게 멋진 자기계발 문장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나답게 살아라. 너 자신을 넘어서라. 자유롭게 선택하라. 이런 말들은 그 자체로 틀리지는 않지만, 너무 쉽게 소비되면 철학이 아니라 포스터 문구가 됩니다.

실존주의는 원래 그렇게 편안한 말만 하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제가 느끼기에는요.
자유는 멋진 권리가 아니라 책임의 다른 이름이고, 선택은 취향을 고르는 일이 아니라, 선택 이후의 나를 감당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AI 시대에 실존주의가 필요하다는 말은 AI를 쓰지 말자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AI의 답을 받되, 그 답을 내 삶에 들여놓을지 스스로 결정하는 것.
그리고 그 결정이 정말 내 생각인지 다시 묻는 것.

 

이 중 두 번째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이 블로그의 글도 초안은 제가 쓰고 평가는 AI에게 받는데, 평가를 받다 보면 AI가 제안한 문장이 머리에 남아 어느 순간 저도 AI와 비슷한 문장을 쓰고 있습니다. 문장 단위일 때도 있고, 표현이나 단어 단위일 때도 있습니다. 
요즘 제가 가장 많이 읽는 타인의 문장은 AI의 문장이고, 가장 많이 본 문장은 스며들기 마련입니다. 

이쯤 되면 테세우스의 배 같은 일이 됩니다. 
문제는 아주 가끔 AI의 표현이 제 마음을 보고 그린 것처럼 정확해서, 한참을 고민해도 더 나은 문장이 안 나온다는 겁니다. 

문장의 경계가 흐려지는 것은, 결국 저의 경계가 흐려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실존주의는 저를 위로하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더 불편하게 만드는 말에 가깝습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문장은 '내가 선택하면 된다'는 만능의 선언처럼 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선택이란 그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제가 감당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책임이라는 말도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습니다.
AI가 낸 전략을 제가 골랐다면, 칭찬받을 때의 애매함도 제 몫이고 실패했을 때의 책임도 제 몫이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어딘가 석연치 않습니다. 책임지겠다는 말은 단단해 보이지만, 흔들린 자존을 다시 세우기 위한 또 하나의 매끄러운 답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책임지는 사람이다.'
이 문장은 멋있습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습니다.
AI의 매끄러운 답을 의심하겠다고 해놓고, 정작 제가 만든 매끄러운 결론에는 너무 쉽게 기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몇 달 동안 고민했던 화두는 이것이었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선택과 책임으로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는다면, 대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가 잘하는 일로 나를 설명할 수 없을 때

AI는 계속 답을 줄 것입니다. 더 빠르고, 더 매끄럽고, 더 그럴듯하게 줄 것입니다. 

시장은 그 답이 어디서 왔는지보다 쓸 만한지를 먼저 볼 것입니다. 저도 아마 계속 AI를 쓸 것입니다.

그러니 아까의 질문은 더 불편한 쪽에 남습니다.

질문을 확장하면 아마 이런 모습일 겁니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 

 

무엇으로 저를 설명해야 할지는 여전히 제 안에서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정했습니다. 잘하는 일로 저를 설명하던 방식만큼은, 이제 버리기로 했습니다.

그게 위안이어서가 아니라, 더는 그 자리에 기댈 수 없다는 걸 제안서 앞에서 이미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세울지는 모릅니다. 그래도 무엇을 버렸는지는 압니다.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