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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장표보다 채워진 장표가 더 어렵다

WORK/AI 시대의 일

빈 장표보다 채워진 장표가 더 어렵다

20년을 넘게 일해도 여전히 빈 장표는 부담스럽습니다. 

 

무엇을 첫 장에 놓아야 할지부터 막막합니다. 

어떤 자료를 근거로 삼아야 할지, 마지막에는 어떤 판단으로 맺어야 할지도 쉽게 정해지지 않습니다. 

자료를 찾고, 목차를 쓰고, 제목을 붙이다 보면 며칠이 금방 지나갑니다.

그 이전에 목차를 쓰면서 흐름을 만들고 나면 이미 진이 빠집니다.


그런데 요즘은 빈 장표보다 이미 채워진 장표가 더 난감할 때가 있습니다. 

AI 리서치 에이전트가 스스로 리서치를 진행합니다. 자료를 요약하고, 인사이트 문장까지 먼저 채워줍니다. 

장표 제목과 소제목, 근거 자료, 제안 방향까지 한 번에 나옵니다. 

꽤 그럴듯합니다. 빈 화면 앞에서 한참 얼어 있던 시간에 비하면, 이건 분명히 큰 도움입니다.


요즘 AI는 검색 결과를 건네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Deep Research라는 이름이 붙은 기능들이 그렇습니다. 

자료를 찾고, 읽고, 요약한 뒤 보고서 형태로 묶어줍니다. 기업들도 이 변화를 단순한 개인 생산성 도구로만 보지 않습니다. 

리서치, 지식관리, 보고서 작성 같은 업무 안으로 AI 에이전트를 넣으려 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자동화가 안심과 완결을 뜻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한 장씩 넘겨보면 말이 됩니다. 장표마다 제목을 꽤 잘 지었습니다. 근거도 제법 탄탄하고, 결론도 이상적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조금씩 어긋납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같은 자료를 여러 번 인용하면서 장표마다 다른 결론을 냅니다. 

프로젝트 맥락을 충분히 줬는데도 애매한 산업군을 분석해서 비교합니다. 

우리 고객사에는 맞지 않는 제안을 너무 확신 있게 넣기도 합니다. 

자료는 맞는데 해석이 다소 비약적입니다. 

문장은 매끄러운데 판단은 첫인상과 달리 헐겁습니다.

 

완전히 틀린 말이면 차라리 쉽습니다. 

같은 자료로 다르게 낸 결론은 가장 적합한 장표만 남기면 되고, 사실관계가 틀렸으면 고치면 됩니다. 

하지만 그럴듯한 장표를 고치는 건 의외로 어렵습니다. 

그냥 제출해도 누군가는 크게 문제 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조금 이상하네, 정도로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냥 둘 수 없습니다. 회사 이름을 걸고 나가는 보고서이기 때문입니다. 

보고서는 개인 메모가 아닙니다. 누가 썼든, 나가고 나면 회사의 판단처럼 읽힙니다. 

그래서 그럴듯하다는 이유만으로 통과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 프로젝트와 연관성을 봐야 하고, 제안이 고객사 상황에 맞는지도 따져야 하고, 결론을 우리가 책임질 수 있는지도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웁니다. 

어떤 장표는 삭제하고, 어떤 장표는 절반만 남깁니다. 

결론이 과하면 낮추고, 근거가 약하면 새로 조사해서 바꿉니다. 다른 산업군의 사례는 걷어냅니다. 

고객사가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은 다시 형편껏 맞춰 씁니다.

 

그런데 몇 장을 고치고 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흐름이 흩어집니다.
AI가 만든 것은 장표 몇 장이 아니었습니다. AI 나름의 논리 구조였습니다. 

도입에서 문제를 만들고, 중간에서 사례를 쌓은 뒤, 뒤에서 제안을 밀어주는 흐름이 있었습니다. 

그 흐름이 정확하다는 건 아니지만, 구조는 있었습니다.

 

사람이 그중 일부를 걷어내면 전체 연결이 흔들립니다. 

틀린 장표를 뺐는데 앞뒤 장표의 의미가 약해집니다. 과한 제안을 낮췄더니 뒤에 붙은 실행안이 뜬금없어집니다. 

다른 산업군 사례를 지우고 나면 그다음 인사이트가 공중에 떠버립니다. 

정확도를 높이려고 손댔는데, 보고서 전체의 설득력은 오히려 떨어집니다.


그때부터는 단순한 검수가 아닙니다. 

AI가 채운 보고서를 고친다는 것은, 틀린 사실 몇 개를 바로잡는 일이 아니라 이미 세워진 논리 구조를 해체한 뒤 다시 하나의 흐름으로 묶는 일입니다. 남은 장표들이 같은 방향을 보게 만들고, 삭제한 장표 때문에 생긴 빈틈을 메우고, 새로 넣은 장표가 전체 흐름을 해치지 않도록 다시 배열해야 합니다.


이 부분에서 AI 에이전트의 한계가 보입니다. AI는 많은 자료를 빠르게 훑고, 여러 출처를 합쳐 그럴듯한 초안을 만듭니다. 

하지만 보고서는 자료를 많이 모았다고 완성되는 문서가 아닙니다. 업종, 고객사, 내부 상황, 실행 가능성, 의사결정자의 입장까지 함께 봐야 합니다.
기업들이 AI 에이전트 도입을 서두르면서도 실제 업무 적용에서 멈칫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에이전트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지만, 빠르게 나온 결과를 조직이 어떻게 검증할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비용, 비즈니스 가치, 리스크 관리가 불분명하면 실험은 쉽게 커지지 못합니다.

2025년 주요 조사에 나타난 AI·에이전트 도입 신호

최소 한 개 비즈니스 기능에서 AI를 정기적으로 사용하는 조직 88%
 
AI 에이전트를 실험하거나 확장 중인 조직 62%
 
12~18개월 안에 에이전트가 회사 AI 전략에 통합될 것으로 보는 리더 81%
 
2025년이 전략·운영을 다시 생각해야 하는 해라고 보는 리더 82%
 
2027년 말까지 취소될 것으로 예측되는 agentic AI 프로젝트 40%+
 

출처 · McKinsey State of AI 2025 (2025.11.5), Microsoft Work Trend Index 2025 (2025.4.23), Gartner (2025.6.25)  |  기준 · 각각 글로벌 AI 설문, 31개 시장 지식근로자·리더, agentic AI 시장 전망  |  해석 · 서로 다른 조사의 값이므로 하나의 순위처럼 비교할 수 없음. 확산과 리스크가 동시에 커진다는 신호로만 읽을 것

실제로 여러 조사가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기업들은 AI와 에이전트를 빠르게 업무 안으로 들이고 있지만, 동시에 상당수 프로젝트가 검증과 비용의 벽에 부딪혀 중단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확산과 회의가 같이 커지고 있는 셈입니다.


보고서 작업도 마찬가지입니다. AI가 초안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과, 그 초안을 회사 이름으로 내보낼 수 있다는 사실 사이에는 아직 꽤 먼 거리가 있습니다. 보고서는 장표의 합이 아닙니다. 각 장표가 맞는 말을 하고 있어도, 전체가 하나의 판단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보고서가 되지 않습니다. 정보를 모아놓은 파일이 아니라, 누군가를 특정한 판단으로 데려가는 문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I가 만든 보고서를 볼 때는 사실관계만 봐서는 부족합니다. 

이 보고서는 결국 누구에게 어떤 판단을 하게 만드는가. 
이 흐름이 우리 프로젝트의 조건에서 성립하는가. 
이 제안은 고객사가 실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사람이 다시 해야 합니다. 

 

AI는 꽤 자신 있게 답하지만, 책임지지는 않습니다. 

고객사의 실제 상황을 판단하지도, 회사 이름으로 그 말을 내보냈을 때의 무게를 알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요즘 보고서 작업은 다른 피로를 만듭니다. 

예전에는 빈칸을 채우느라 힘들었다면, 지금은 채워진 말을 의심하느라 힘듭니다. 

빈 장표는 적어도 정직합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AI가 채운 장표는 이미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꽤 자신 있는 말투로요.


자동화가 더 좋아질수록 사람의 일은 줄어들 것입니다. 

하지만 없어지는 것은 주로 앞부분입니다. 자료를 찾는 시간, 초안을 만드는 시간, 장표에 첫 문장을 올리는 시간은 줄어듭니다. 

반대로 마지막에 남는 일은 더 무거워졌습니다. 

사람이 책임져야 할 부분은 그럴듯한 말을 의심하고, 흩어진 흐름을 다시 묶어 내보낼 수 있는 문서로 만드는 일입니다.

 

AI가 보고서의 첫 페이지를 열어주는 시대에도, 마지막 질문은 오래전부터 들어온 말로 돌아옵니다.

 

이 문서를 회사 이름으로 내보낼 수 있는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