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업용 하드디스크를 사려던 손이 멈췄습니다.
집에 있는 사진과 문서, 오래된 작업 파일을 따로 보관해두려고 마음먹은 지는 꽤 됐습니다. 클라우드에 올려둔다고 마음이 완전히 놓이는 것도 아니어서, 외장 하드디스크 하나쯤 더 있어야겠다 싶었습니다. 4TB를 볼까, 8TB까지 갈까 장바구니를 오가다가 가격표에서 멈췄습니다. 제가 기억하던 가격이 아니었거든요. 부품이란 시간이 지나면 싸지는 게 세상의 이치인 줄 알았는데, 저장장치 앞에서는 그 이치가 무너져 있었습니다.
숫자로 보면 더 이상합니다. 세계 최초의 4TB 하드디스크는 2011년 말 히타치 데스크스타 브랜드로 나왔습니다. 출고가가 399.99달러, 당시 환율로 약 46만 원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히타치의 하드디스크 사업을 이어받은 도시바의 4TB 제품은 35만 원쯤 합니다. 15년 동안 겨우 10만 원 내린 셈입니다. 같은 시기에 200만 원이 넘던 인텔 제온 CPU가 지금은 키링으로 써도 될 만큼 중고 가격이 떨어진 걸 생각하면, 저장장치의 이 고집스러운 가격은 확실히 이상한 구석이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신호는 계속 있었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가 움직이고, HBM이 부족하고, AI 데이터센터 투자가 늘어난다는 기사가 이어졌습니다. 나라 곳곳에 반도체 단지를 짓는다는 뉴스도 나왔습니다. 기사 속 숫자는 늘 컸습니다. 수백조 원 투자, 글로벌 공급망, 국가 경쟁력. 중요한 일이라는 건 알겠는데, 제 생활과 닿아 있는 이야기로는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반도체 공장 부지에 땅을 가진 사람도 아니고, 하이닉스 주식으로 수익을 본 사람도 아닙니다. AI가 GPU를 얼마나 잡아먹는지, HBM이 왜 중요한지 대략 알아도, 그건 데이터센터 안쪽에서 벌어지는 남의 일 같았습니다. 뉴스 화면에는 거대한 공장 조감도가 뜨고, 저는 집에서 하드디스크 가격이나 검색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가격표 앞에서, 멀리 있던 뉴스가 저에게 건너왔습니다. 하드디스크만이 아닙니다. 휴대폰은 어느새 더 높은 가격대에서 시작하고, 노트북도 그렇습니다. 특히 메모리나 저장장치를 조금만 올리려 하면 숫자가 성큼성큼 뜁니다. 전자제품은 늘 비쌌지만, 이건 결이 다른 비쌈입니다.
물론 이 모든 걸 AI 반도체 수요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환율도 있고, 물류비용도 있고, 브랜드의 가격 전략도 있습니다. 그래도 장바구니 앞에 앉은 사람에게 그런 설명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이유가 여럿이어도, 결국 못 사는 건 매한가지니까요.
AI는 화면 속에서만 돌아가지 않습니다. 챗봇이 답하고,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검색이 요약되는 동안 어딘가의 서버는 전기를 쓰고 열을 냅니다. 그 서버에는 GPU만 들어가는 게 아니라 메모리도, 저장장치도 들어갑니다. 세상이 AI를 더 쓸수록 그 부품들이 더 필요해지고, 그 수요는 돌고 돌아 제가 사려던 하드디스크 한 개의 가격에도 얹힙니다. AI는 서버에서 전기를 태우고, 저는 장바구니 앞에서 속을 태웁니다.
반도체 호황이라는 말은 누군가에게는 수익으로 도착합니다. 주식을 산 사람, 공장을 짓는 기업, 장비를 대는 회사, 단지가 들어서는 지역은 그 흐름을 각자의 방식으로 만납니다. 저는 그 흐름을 하드디스크를 장바구니에 넣었다 빼는 일로 만났습니다. 같은 호황인데, 도착하는 방식이 배당이냐, 청구서냐로 서로 갈리는 셈입니다.
사실 이 느낌이 낯설지 않습니다. 주가가 오를 때 저는 그 수혜를 별로 받지 못했는데, 부품값이 오를 때는 소비자로서 꼬박꼬박 청구서를 받습니다. 좋은 것은 늘 남의 몫으로 크게 지나가고, 부담은 제 몫으로 잘게 남습니다. 세상 여러 일이 대체로 그런 식이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반도체 산업이 잘되면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한국에 중요한 산업이고, AI 시대의 핵심 인프라라는 것도 압니다. 다만 그 거대한 산업이 커지는 장면을 뉴스로 보다가, 같은 흐름이 제 장바구니 안에서는 그저 비용으로 나타날 때, 마음이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지 않을 뿐입니다.
호황은 저 같은 일반 소비자에게는 남의 일입니다. 휴대폰을 한 해 더 쓰기로 하고, 노트북 옵션에서 저장장치를 한 단계 낮추고, 외장하드디스크 구입을 다음으로 미루는 것. 절약이라 부르기도 뭣한, 그냥 조용한 포기들입니다. 산업 기사에는 실리지 않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누가 하드디스크를 사려다 창을 닫았다는 건 경제 뉴스가 되지 않으니까요.
AI 시대를 실감하는 방식이 꼭 미래지향적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AI가 만들어낸 근사한 영상에 감탄할 수도 있지만, 정작 그 영상을 담아둘 하드디스크 앞에서 조용히 창을 닫는 일로 오기도 합니다. 세상이 더 많은 데이터를 만들고 더 많은 서버를 돌리는 동안, 저는 집에 있는 사진 몇 장을 어디에 둘지 다시 계산합니다.
한쪽에서는 AI를 더 돌리려고 더 많은 반도체를 원합니다. 다른 한쪽에서 저는 하드디스크 하나를 사려다 멈칫합니다.
왠지 만날 일이 없을 것 같던 그 먼 거리가, 제 장바구니 안에서 접혔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