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걸레 청소기를 사고 싶습니다.
집에 청소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물청소가 가능한 로봇청소기도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물걸레 청소기도 따로 있었습니다. 아이가 그것을 청소도구가 아니라 장난감에 가까운 물건으로 받아들였고, 결국 고장이 났습니다. 버린 지 한 달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다시 사겠다는 말은 명분이 약했습니다. 아내는 저보다 더 미니멀리스트라서 집에 물건이 늘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 가전제품은 더 그렇습니다. 한번 들어오면 자리를 차지하고, 전원선은 정리가 안되고, 나중에는 고장 난 채 구석에 서 있는 모습을 미리 상상하는 것 같습니다. 아내에게 물걸레 청소기는 필요의 문제가 아니라, 집 안에 또 하나의 애물단지를 들이는 문제입니다.
저도 이성적으로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하지만, 갖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AI에게 물었습니다. 물걸레 청소기를 사는 게 맞을까. 아니면 아내 말대로, 이미 물청소 가능한 로봇청소기가 있으니 이대로 지내는 게 맞을까. 상황도 꽤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집에 대안이 있다는 것과 아내가 반대한다는 것, 얼마 전 비슷한 물건을 버렸다는 것까지요. 그럼에도 제가 물걸레 청소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이유도 여러 가지 적었습니다.
사실 이 정도로 길게 설명했다는 것부터 이미 수상합니다. 정말 판단이 필요했다면 질문은 짧아도 됐습니다. 예를 들어 집에 로봇청소기가 있고, 아내가 반대하고, 비슷한 물건을 한 달 전에 버렸습니다. 이 상황에서 물걸레 청소기를 다시 사도 될까요. 이렇게만 물어도 충분합니다. 그런데 저는 열심히 배경을 붙였습니다. 물걸레 청소의 필요성, 바닥의 찝찝함, 로봇청소기의 한계, 직접 밀고 지나간 자리에서 오는 만족감 같은 것들을 적었습니다.
질문을 한 게 아니라 변론을 준비한 셈입니다. AI는 합리적으로 답했습니다. 배우자가 반대하고, 이미 대안이 있다면 굳이 새 물걸레 청소기를 들일 필요는 없다고요. 다만 제가 물청소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낀다면, 배우자와 협의한 뒤 합리적인 가격대의 제품을 고려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차분하고 균형 잡힌 답이었습니다.
저는 거기서 “배우자와 협의”와 “합리적인 가격대”를 읽지 않았습니다. “고려할 수 있다”만 읽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AI는 말린 쪽에 가깝지만, 저는 허락으로 읽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판단을 구한 게 아니었습니다. 이미 사고 싶은 마음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다만 그 마음이 너무 노골적으로 보이면 스스로 민망하니까, 논리의 외투를 입혀주고 싶었던 겁니다.
AI가 저를 부추긴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충분히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배우자와 협의하라고 했고, 집 안에 대안이 있으면 굳이 살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게 편리한 방식으로 문장을 읽습니다. 불리한 조건은 배경으로 보내고, 유리한 문장만 형광펜으로 칠합니다.
이런 질문은 생각보다 자주 합니다.
이 메일 이렇게 보내도 될까.
이 제목 괜찮을까.
이 물건 사도 될까.
겉보기에는 질문인데 속으로는 이미 답을 정해둔 경우가 많습니다. AI는 그런 질문에 장점과 단점을 정리해주고, 조건을 붙이고, 조심스러운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저는 그중 제 편처럼 들리는 문장만 골라 담습니다.
사람에게 물으면 불편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아내는 바로 알아차립니다. 제가 이미 사고 싶어 한다는 것을요. 친구에게 물어도 비슷합니다. “너 이미 결정했잖아.” 이런 말을 들을 가능성이 큽니다. 사람은 질문 뒤에 숨어 있는 욕심을 너무 잘 봅니다. 말투와 표정에서 그리고 굳이 길게 설명하는 이유에서 제 속마음을 알아챕니다.
AI는 그 정도로 저를 몰아세우지 않습니다. 반대 의견도 내지만, 정면으로 “사지 마세요”라고 말하기보다, 조건과 가능성을 나눠서 말합니다. 제 기분을 크게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균형을 잡습니다. 어쩌면 제가 AI에게 자주 묻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AI는 저를 판단하지 않고, 제 욕망을 너무 노골적으로 지적하지 않습니다. 더 냉정하게 답하라고 설정할 수도 있고, 판단 기준을 더 엄격하게 잡아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AI까지 정색하고 반대하면, 정말 핑계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그냥 사고 싶어서 샀는데, 이제는 AI에게 물어보고 삽니다. 조건을 검토했고, 신중하게 판단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제가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합리적인 판단이 아니라 발췌입니다. 배우자와 협의하라는 문장은 흐린 글씨로 밀어놓고, 고려할 수 있다는 문장만 또렷하게 읽었습니다.
AI는 제 선택을 도와줍니다. 아니, 제가 이미 한 선택을 덜 부끄럽게 만들어줍니다.
물걸레 청소기는 배송중입니다.
제 양심도 어딘가로 배송되었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