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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를 읽는 사람이 오래된 음악을 틀 때

LIFE/나의 취향

트렌드를 읽는 사람이 오래된 음악을 틀 때

40대가 오래된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쓴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취향이 확고해서가 아니라, 새 음악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젊은 시절의 음악에 머문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기분 좋은 분석은 아니지만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저도 어느 순간부터 오래 들어서 아는 노래가 편합니다. 유행하는 드라마를 시작하는 것보다 줄거리를 아는 영화의 한 장면을 다시 보는 쪽이 좋습니다. 전자잉크 화면, 긴 글, 오래된 책 같은 것들에 마음이 갑니다. 한 문장으로 정의하면 저에게 당장 반응하라고 요구하지 않는 것들이 좋습니다. 이런 취향에 그럴듯한 이름을 붙이고 싶었습니다. 느린 매체를 좋아한다거나, 오래 버틴 것에 끌린다거나, 디지털 시대에도 아날로그의 질감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말에는 제 약한 부분이 빠져 있습니다.

제 일은 느리고 오래된 것의 반대편에 있습니다. 
저는 트렌드를 읽어야 하는 일을 합니다. 읽는 데서 끝나지도 않습니다. 다음 흐름을 짐작하고, 기업이 그 흐름 안에서 대중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제안해야 합니다. 고객사 앞에서는 요즘 사람들이 어디에 반응하는지 말해야 하고, 팀원들 앞에서는 시대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 사람처럼 보여야 합니다.

일로 하는 것과 제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회의에서 “요즘 이거 많이 보던데요?”라는 말이 나오면 괜히 긴장합니다. 팀원이 아무렇지 않게 밈 하나를 던졌는데 반 박자 늦게 웃을 때도 있습니다. 고객사 담당자가 최근 유행한 프로그램이나 숏폼 문법을 예로 들면, 속으로 그게 대체 뭐지. 아니, 이름은 들어본 것 같은데. 지금 표정으로 티가 나고 있나. 한참을 고민합니다.

그래서 따로 챙겨봐야 합니다. 커뮤니티를 훑고, 유행하는 음악을 듣고, 화제가 된 프로그램을 요약한 영상으로 봅니다. 이슈가 왜 번졌는지, 사람들은 어디에서 웃었는지, 어떤 표현이 댓글에서 돌았는지 봅니다. 말하자면 리서치입니다. 다만 즐거움보다는 출석 체크에 가까운 날이 대부분입니다.

오늘의 밈을 확인하고, 오늘의 조롱과 웃음과 피로를 확인합니다. 때로는 요즘 커뮤니티에 만연한 혐오에 섬찟함을 느끼는 날도 있습니다. 사실 저 같은 사람에게는 피곤한 일입니다. 반대로 그걸 놀이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최신 프로그램을 즐기고, 때로는 밈을 만들어내고, 때로는 따라 쓰는 일이 자연스러운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흐름이 생활이겠지만, 제게는 버거운 학습 자료입니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는 건 제 방식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모른 채 앉아 있을 수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궁금해서 보다가, 어느 순간부터 놓치지 않기 위해 봅니다. 새것을 보는 일이 설렘보다 관리에 가까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문득 걱정이 됩니다.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트렌드를 다루는 일이란 젊은 척하는 것도, 새것을 무조건 좋아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흐름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무엇에 반응하는지 읽어야 기업이 그 흐름에 올라타야 할지, 거리를 둬야 할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 판단을 하려면 계속 집어넣어야 합니다. 음악도, 프로그램도, 커뮤니티의 말투도, 플랫폼의 변화도, 들불처럼 번지는 수많은 밈도 집어넣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새것들이 제 안으로 소화되는 게 아니라, 쌓여버린 숙제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오래된 음악이 편한지도 모릅니다. 예전에 듣던 음악은 저에게 따라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미 지나간 것이기 때문에 놓칠 걱정이 없고, 늦게 들어도 뒤처지는 일이 아닙니다. 이 노래가 요즘 어디서 유행하는지, 어떤 세대가 다시 듣는지, 숏폼에서 챌린지로 바이럴되는지 몰라도 됩니다. 그냥 들으면 됩니다.
책도 비슷합니다. 오래된 책은 오늘 안에 생각을 정리하라고 재촉하지 않습니다. 긴 글도 빠르게 반응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북리더의 전자잉크 화면은 스마트폰처럼 저를 다른 곳으로 끌고 갈 힘이 약합니다. 기능이 부족해서 오히려 안전한 물건입니다.

취향은 앞서가는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남들보다 먼저 알아보고, 더 잘 고르고, 더 깊게 이해하는 게 취향이라고 여겼습니다. 요즘은 다르게 느낍니다. 취향은 뒤처져도 괜찮습니다. 남들보다 빨리 알 필요가 없고, 지금 반응하지 않아도 되고, 모른다고 해서 부끄럽지 않은 게 지금 저의 취향입니다.
최신의 것들은 자꾸 묻습니다.

이거 봤어?
이거 이해했어?
이걸 어떻게 활용할 건데?

오래된 것들은 묻지 않습니다. 제가 언제든 다시 찾아가면 그 자리에 있습니다. 예전에 듣던 음악은 왜 이걸 이제 듣냐고 하지 않습니다. 읽다 만 책은 늦었다고 추궁하지 않습니다. 느린 화면은 다음 콘텐츠로 넘어가라고 몰아세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느린 것들을 좋아합니다. 취향이 고상해서가 아니라, 빠른 것들 앞에서 자주 지치기 때문입니다.

저는 내일도 최신을 읽어야 합니다. 고객사 회의에 들어가고, 팀원들과 이야기하고, 요즘 사람들이 무엇에 웃고 피로해하는지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그 일을 아주 싫어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재미있는 순간도 있고, 흐름이 보일 때의 즐거움도 있습니다. 그런데 쉬는 시간까지 최신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밤에는 스티비 원더의 <Lately>를 틀어둡니다. 알고리즘이 권한 아이브의 새로운 싱글은 내일 듣기로 합니다. 내일의 제가 또 어떻게든 확인할 겁니다.

최신을 버티기 위해, 오늘은 최신이 아닌 것에 기대어 있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