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끔 쓰지도 않을 물건을 열심히 고칩니다.
오래된 노트북이나 구형 PC를 보면 그냥 지나치기 어렵습니다. 이미 느리고 배터리는 믿기 어려운데다가 프로그램 하나 여는 데에도 팬이 가쁜 숨을 고르지만, 그래도 전원 버튼을 눌러보게 됩니다. 화면이 켜지면 일단 기분이 좋아집니다. CPU가 무엇인지 보고, 램은 몇 기가인지 확인하고, 저장장치가 아직 살아 있는지도 살펴봅니다. 웨이백머신으로 제조사 웹사이트의 사라진 페이지까지 확인하고, 어디까지 지원되는지 찾아 보면서, 제 손은 어느새 다른 검색어를 입력하고 있습니다.
구형 PC에 윈도11을 억지로 설치해볼 수는 없을까.
오래된 맥북에 최신 macOS를 우회해서 올릴 방법은 없을까.
사실 맥은 잘 안 됩니다. 되는 척하다가 UI가 깨지거나, 로딩이 끝없이 길어지는 식으로 완곡하게 거절을 표현합니다. 그래도 한 번쯤 해볼만 합니다. 누군가 성공했다는 글을 보면 제 기기도 될 것 같고, 그 믿음은 자주 거부당하지만, 틀리는 과정까지 포함해서 묘하게 재밌습니다.
윈도를 가볍게 만들고, 필요 없는 프로그램을 지우고, 예전 버전 앱을 찾아 설치하다 보면 노트북이 조금씩 살아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굴러다니던 SSD를 달아주면 갑자기 회춘한 듯 노익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완전히 새것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그 정도면 충분히 제 기분은 좋아집니다.
가끔은 쓸데없이 돈도 쓰게 됩니다. DDR5 시대에 DDR3 램을 찾느라 중고장터나 해외 쇼핑몰까지 뒤지는 것은 예사입니다. 새 노트북을 사는 편이 여러모로 낫다는 걸 알면서도 구형 램 4GB 두 장을 검색하고, 가격이 싸면 기분이 좋아졌다가 국제 배송비를 보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그래도 장착하고 부팅이 되는 순간에는 그런 계산이 잠깐 잊혀지는 것 같습니다.
살아났네.
그러고 나서 그걸 제가 쓰느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느 정도 쓸만해지면 누군가에게 주거나, 다시 서랍에 넣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저도 저를 잘 모르겠습니다. 쓰기 위해서라면 이미 주력으로 쓰는 장비가 있고, 훨씬 빠르고 조용하며 배터리도 오래갑니다.
오래된 CD 플레이어도 비슷합니다. 예전 물건들은 자기만의 규격을 참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 충전기도 다르고, 케이블도 다르고, 배터리도 달랐습니다. 어떤 건 납작한 배터리를 요구하고, 어떤 건 전용 배터리 모듈 없이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CD 플레이어 하나 살리려고 알리익스프레스에서 배터리 케이스와 충전기를 찾다 보면,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일인지 싶을 때도 많습니다.
요즘 케이블이 웬만해선 USB-C로 정리된 게 정말 다행입니다. 노트북과 휴대폰이 같은 케이블로 충전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거든요. 케이블 하나만 들고 나가도 덜 불안하고, 예전처럼 서랍을 뒤집으며 이 충전기는 대체 누구 것이었나 중얼거릴 일도 줄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편해지면 너무 심심해진 거 아니냐고 심술도 부려봅니다. 예전 물건은 귀찮았습니다. 단자도 제각각이고, 배터리 넣는 방식도 달랐으며, 같은 회사 제품인데도 케이블이 서로 안 맞는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성가신 일인데, 그 성가심 덕분에 물건마다 성격은 뚜렷했습니다. 생긴 것도 다르고, 꽂는 법도 다르고, 다시 살리는 방법도 달랐던 것이죠.
요즘 장비가 훨씬 낫다는 건 인정합니다. 빠르고 얇고 조용하고, 저는 그 편리함을 좋아합니다. 한참 구형 노트북과 씨름하다가 주력 장비로 돌아오면, 빠른 부팅과 조용한 팬과 케이블 하나로 충전되는 생활이 새삼 고맙습니다.
아, 세상은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오래된 물건에도 마음이 갑니다. 그 녀석들도 한때는 충분히 좋았고, 놀라운 발전이었고, 누군가의 책상 위에서 가장 중요한 장비였을 겁니다. 어떤 사람은 그걸로 리포트를 썼고, 누군가는 사진을 정리했을 겁니다. 어느 집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왔을 테고, 어느 사무실에서는 밤늦게까지 엑셀이 열려 있었을 겁니다.
처음부터 못난 물건은 아니었는데 시간이 물건들을 놓고 가버렸습니다.
가장 먼저 OS 업데이트가 끊겼고, 다음에는 배터리가 부풀어 올랐을 겁니다. 전용 충전 케이블이 정리라는 이름의 블랙홀로 사라지면서, 전원을 켜는 일조차 불가능해지는 날이 옵니다. 한때는 가장 빠르다고 들었던 물건이 어느 순간 세상 느린 물건이 됩니다. 당대 최고라고 불렸던 물건이 세월 앞에서 밀려납니다.
그래서 그냥 버리기가 아쉽습니다. 최신 장비보다 낫다고 우기지는 못합니다. 최신 장비는 아무리 엔트리 모델이어도 10년 전의 플래그십을 이깁니다. 성능으로도 배터리로도 편의성으로도 이깁니다. 오래된 플래그십을 편들어보려 해도 벤치마크 앞에서는 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한 번쯤은 다시 켜보고 싶습니다. 아직 끝난 건 아니라고 말해보는 기분입니다. 버리려고 보면 꼭 뭔가 가능성이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램만 늘리면, SSD만 바꾸면, 배터리만 구하면 다시 돌아갈 것 같습니다. 쓸 수 있게 되면 마음이 놓입니다. 그다음에는 꼭 제가 쓰지 않아도 됩니다. 누군가 새 주인을 찾아도 좋고, 서랍에 다시 들어가도 괜찮습니다. 적어도 한 번은 다시 켜졌으니까요.
변명같지만, 이 취미 때문에 물건을 잘 못 버립니다. 케이블 하나를 버리려다가도 멈칫합니다. 혹시 이게 어느 기기의 전용 케이블이었나 싶고, 어댑터를 보면 전압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게 오래된 램과 소속이 지워진 배터리 케이스와 이름 모를 젠더는 서랍 어딘가에 남습니다.
그 서랍에 저는 가능성의 요람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정리를 원하는 아내에게는 잡동사니지만, 저에게는 다시 쓸 수 있는 물건들입니다. 물론 쓸만해진 물건들 대부분은 다시 잠듭니다. 아주 오래 잠들고, 가끔은 제가 무엇을 살리려고 했는지도 잊어버립니다.
그래도 구형 물건을 만지는 일은 작은 놀이이고, 한편으로는 시간 여행이기도 합니다. 느린 부팅 화면을 보고 있으면 예전의 속도가 떠오릅니다.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컵라면에 물을 붓고, 3분이 지날 즈음 라면을 한젓가락 집어 들면서 윈도우 로고가 뜨는 정도의 속도면, 그 당시에는 충분히 빨랐습니다. 그때는 이 화면이 좋았고, 부팅되는 소리가 좋았습니다. 도토리로 한껏 꾸민 싸이월드 미니홈피가 뜨는 데 하세월이었지만, 그 시절에는 이 물건 하나로 꽤 많은 일을 했습니다.
과거가 돌아오지는 않지만, 그 시절의 속도를 잠깐 만져볼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구형 기기를 복원하면서 최신 기기를 더 좋아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말이 조금 모순되고 웃기지만, 취향이라는 게 남에게 설명하려고 하면 대체로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쓰지도 않을 물건을 고치고, 고쳐놓고 다시 서랍에 넣고, 언젠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며 케이블을 남겨둡니다.
합리적인 취미는 아닌데 그래도 이 재미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물건을 쓰고 싶은 마음보다, 아직 쓸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것 같습니다.
제 서랍에는 쓰지 않는 물건들이 있습니다. 한 번은 다시 켜졌던 물건들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