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내는 나를 케이블 성애자라고 부른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집 안에 충전 케이블이 많고, 서랍 안에도 케이블이 많고, 어디선가 또 괜찮아 보이는 케이블을 보면 한참 들여다봅니다. 이미 비슷한 것이 있는지도 모르고 또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있을 것 같긴 한데, 아내가 부지런히 서랍 안쪽으로 숨겨두었고, 저는 그 사실을 잠깐 잊었을 뿐입니다.
물론 이 변명은 설득력이 낮습니다.
하지만 제 입장도 있습니다. 저는 케이블을 단순한 부속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테리어를 완성하는 마지막 조각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좋은 케이블은 인테리어를 망치지 않는 역할을 합니다.
잘 정리된 공간에 가면 이상하게 눈에 걸리는 것들이 있습니다.
가구도 좋고, 조명도 좋고, 향도 좋고, 음악도 좋은데 바닥 한쪽에 멀티탭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거나 충전 케이블이 구불구불 엉켜 있으면 그 장면이 계속 보입니다.
제게는 그게 방바닥에 머리카락이 수십 가닥 널려 있는 것을 본 기분을 선사합니다.
하나쯤은 대수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눈에 들어온 순간 이상하게 계속 보입니다.
물론 이것은 제 미감입니다. 누군가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집에 가서 케이블을 보며 마음속으로 평가표를 작성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 집에서는 조금 다릅니다. 케이블도 아무렇게나 구불구불한 것보다 정리하기 편한 것이 좋습니다.
실리콘 재질로 부드럽게 감기는 것, 패브릭 재질이라 펴짐과 구부러짐이 자연스러운 것, 색이 튀지 않고 주변 물건과 덜 싸우는 것.
그런 것들을 고르게 됩니다.
멀티탭도 마찬가지다
멀티탭은 기능만 보면 아주 단순한 물건입니다.
전기를 나눠주는 장치. 그런데 집 안에서는 의외로 존재감이 큽니다.
아무렇게나 놓인 하얗고 검은 멀티탭은 때로 생각보다 거슬립니다.
그렇다고 인테리어 멀티탭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요란한 제품에도 손이 잘 가지 않습니다.
멀티탭은 자기주장을 할 게 아니라 자신을 공간에 녹여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잘 보이지 않는 곳에는 최대한 깔끔한 멀티탭을 숨겨 씁니다.
방 안에서는 이케아나 브레넨스툴처럼 기능에 충실하고 존재감이 크지 않은 제품을 고르는 편입니다.
반대로 거실처럼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곳에는 AVOLT 같은 큐브 형태의 멀티탭을 씁니다.
스웨덴 브랜드인데, 제가 보기에는 이런 형태의 멀티탭 중 여전히 균형이 가장 좋습니다.
단순히 멀티탭인데도 놓였을 때 그 공간에 덜 미안합니다.

물론 단점도 있습니다. 무게감이 있고, 큐브 형태의 모서리가 꽤 뾰족합니다.
떨어뜨리면 발등이든 마룻바닥이든 단순히 ‘아야’ 하고 끝날 것 같지 않습니다.
작은 조형물이 아니라, 무겁고 각진 플라스틱 덩어리라는 사실을 몸으로 깨닫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그런 물건이 좋습니다.
케이블과 멀티탭은 제품보다 덜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생각보다 오래 보입니다.
노트북은 닫으면 사라지지만 전원 어댑터는 바닥에 남습니다.
스피커는 예쁘게 놓여 있지만 뒤쪽의 케이블은 계속 존재합니다.
TV는 벽에 붙어 있어도 HDMI 케이블과 전원선은 어딘가에서 자신의 존재를 주장합니다.
무선의 시대라고 하지만, 집 안의 많은 물건은 여전히 선에 의지해 작동합니다.
기술은 선을 없앤 것이 아니라, 선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 넣은 것에 가깝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이 완전히 보이지 않으면 괜찮습니다.
문제는 대부분 애매하게 보인다는 데 있습니다. 책상 아래, 소파 옆, 침대 머리맡, TV 뒤.
케이블은 늘 반쯤 숨어 있고 반쯤 드러납니다.
이 반쯤이라는게 더 무섭습니다.
‘샌드위치를 먹다 발견한 가장 끔찍한 바퀴벌레는 몇 마리인가?’ 라는 심리학적인 질문에, ‘반마리’라는 생물학적인 답변은, 이 반쯤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짜증나는지를 드러내는 백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완전히 보이는 물건이라면 디자인을 고르면 되고, 완전히 숨길 수 있는 물건이라면 정리하면 됩니다.
케이블은 그 사이에서 자꾸 생활의 틈을 드러냅니다.
케이블에 돈을 아끼면 더 큰 게 망가진다
제가 케이블에 신경 쓰게 된 데에는 미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트라우마라고 하기에는 조금 우습지만, 제 안에는 케이블에 돈을 아끼면 더 큰 것이 망가질 수 있다는 경보 체계가 있습니다.
대학생 시절의 일입니다. 몇 달을 아르바이트해서 나나오 에이조 모니터를 샀습니다.
당시 제게는 거의 보물 같은 물건이었습니다.
200만원 가까이 했고, 현재 40대 유부남에게도 그렇지만, 대학생에게 결코 가벼운 금액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DVI 케이블은 기존에 쓰던 싼 것, 이른바 막선을 그대로 썼습니다.
사실 모니터에 동봉된 케이블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멍청한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쓰던 걸 계속 쓰고, 동봉된 새 케이블은 아껴뒀다가 나중에 쓰자.'
지금 돌아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절약입니다. 새 모니터를 사놓고, 그 모니터를 제대로 연결할 케이블은 아껴두겠다는 판단.
인간은 가끔 아주 작은 것을 아끼려다 훨씬 큰 것을 위태롭게 만듭니다.
결과적으로 그 모니터는 '퍽'하는 단말마와 함께 생을 마감했습니다
원인은 케이블 내부 쇼트로 인한 DVI 연결부와 모니터 메인보드의 파손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영상 케이블이나 데이터 케이블을 고를 때 조금 더 신중해졌습니다.
HDMI, DVI, USB-C 기반 썬더볼트 같은 케이블에는 단순한 신호선만 있는 것이 아니라 5V 전원이나 보조 전원 라인, 제어 신호선도 함께 들어갑니다. DP 케이블 역시 영상 신호 외에 보조 전원과 제어선이 포함됩니다.
문제는 그 전원이 잘못된 핀이나 의도하지 않은 경로로 흘러 들어갈 때입니다. 케이블 내부 단락이나 결선 불량이 있으면 포트 주변의 보호회로, 신호 입력단, 전원 제어 회로가 차례대로 손상될 수 있고, 제품의 메인보드까지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HDMI, DP, 썬더볼트 케이블도 가능하면 규격 인증이 확실한 것을 사려고 합니다.
쇼핑할 때 그런 걸 찾으며 약간 두근거리는 제 자신을 보면 좀 이상하긴 합니다.
하지만 한 번 비싼 모니터를 보내본 사람에게, 케이블은 더 이상 하찮은 부속품이 아닙니다.
제게 케이블은 두 가지가 기준이 되었습니다.
하나는 미감의 문제입니다. 공간에 어떻게 놓이는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휘어지는가, 책상 위에서 얼마나 덜 거슬리는가.
다른 하나는 신뢰의 문제입니다. 이 선이 내 기기를 안전하게 연결해줄 것인가, 전력을 제대로 감당할 것인가.
그 작은 선 하나에 제품 경험과 불안이 같이 걸려 있습니다.
그래서 케이블은 제게 가심비가 좋은 영역이기도 합니다.
물론 오디오퀘스트, 와이어월드, 실텍 같은 하이엔드 케이블의 세계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거기는 짧은 케이블 하나가 갑자기 가전 가격을 넘어서기도 합니다. 그 세계는 논외로 하겠습니다. 저는 아직 그 정도의 신앙까지는 가지 않았습니다.
다만 일반적인 충전, 전원, 데이터 케이블의 영역에서는, 조금 더 좋은 것을 사도 전체 비용이 크게 폭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체감은 꽤 큽니다. 손에 잡았을 때 너무 뻣뻣하지 않고, 감았다 풀어도 형태가 자연스럽고, 색과 재질이 주변 물건과 크게 싸우지 않습니다. 스펙표에는 나오지 않지만, 매일 쓰는 물건에서는 그런 정돈감이 꽤 중요합니다.
본체 이후의 장면
제품에 번들로 들어 있는 케이블을 볼 때도 비슷한 생각을 합니다.
대부분의 제조사는 케이블을 박스 안의 빈틈을 메우는 부속품처럼 다룹니다.
최대한 작게 구겨 접고, 얇은 비닐에 넣고, 박스 구석에 밀어 넣습니다.
꺼내보면 이미 선에는 꺾인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펼쳐도 구불구불합니다. 기능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품을 처음 꺼내는 경험에는 조금 흠집이 납니다.
제 기준에서 번들 케이블을 가장 잘 다루는 쪽은 애플입니다.
애플의 케이블은 대체로 둥글게 말려 있습니다. 라이트닝이든 USB-C든 전원 케이블이든, 선이 억지로 꺾여 있지 않습니다.
풀었을 때도 자연스럽습니다. 아주 사소한 차이처럼 보이지만, 저는 그 차이를 봅니다.
애플은 제품 경험이 본체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어떤 제품은 본체는 꽤 잘 만들어놓고, 케이블에서 갑자기 경험이 망가집니다.
제품은 멋진데 케이블은 구겨져 있고, 어댑터는 벽돌 같은 생김새답게 공간과 어울릴 생각이 없습니다.
마치 포멀한 턱시도를 입었는데 발에는 피셔맨 샌들을 신고 있는 느낌입니다.
본체는 디자인했지만, 본체 이후의 장면은 방치한 것처럼 보입니다.
문제는 기업들도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기업의 제품 상세 페이지를 보면, 케이블이나 전원선을 노출한 이미지가 없습니다.
무선 전원 시대가 도래한 게 아니라, 보기 안 좋으니까 일부러 지운 겁니다.
그리고 본인들이 생각하는 소비자의 제품 경험에서도 그 부분을 지웠습니다.
눈만 가리면 숨었다고 생각하는 아이를 보고 웃을 게 아닙니다. 기업들이 하는 행동이 세살배기 아이만큼이나 천진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케이블이 바로 그 본체 이후의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보통 제품을 본체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 제품은 본체 혼자 존재하지 않습니다.
충전기와 어댑터와 케이블과 멀티탭과 콘센트까지 함께 존재합니다.
그 연결부가 허술하면 전체 경험도 어딘가 허술해집니다.
정돈된 공간이 케이블과 멀티탭에서 무너지는 것이 싫고, 비싼 기기가 싸구려 선 하나에 기대는 것이 불안합니다.
그래서 조금 더 좋은 케이블을 사고, 조금 더 나은 멀티탭을 고르고, 서랍에 비슷한 선들이 쌓입니다.
아내는 그걸 보고 저를 케이블 성애자라고 부릅니다.
반박은 어렵습니다. 다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케이블은 선이 아니라, 제품 경험의 말단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 말단이 생각보다 오래 보입니다.
모두가 이런 것에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케이블은 그냥 케이블입니다. 충전만 잘 되고, 데이터만 잘 오가면 충분합니다.
저도 그 판단을 존중합니다. 다만 제게는 그 선들이 조금 더 많은 것을 말합니다.
이 제품이 어디까지 신경 썼는지, 이 공간이 어디까지 정리되었는지, 내가 이 물건을 얼마나 오래 기분 좋게 쓸 수 있을지.
무선의 시대가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 서랍은 여전히 선으로 가득합니다.
케이블은 여전히 거슬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잘 고른 케이블은, 의외로 기분을 좋게 합니다.
끝.
아니 그러니까 여보... 이건 다이소에서 파는 5,000원짜리 멀티탭이랑 다른거야. 어차피 전원만 들어오면 되는 거 아니냐고? 아냐, 난 이게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어... 못살겠으면 나가라고? 아니, 잠깐만 여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