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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AI 생각이고, 네 생각은 대체 뭘까.

WORK/AI 시대의 일

이건 AI 생각이고, 네 생각은 대체 뭘까.

요즘 팀원들이 초안을 만들어 오는 속도가 예전보다 빨라졌습니다.
빈 장표를 붙잡고 오래 멈춰 있는 경우가 거의 없어진 것이죠. 목차도 제법 잘 작성되어 있고, 제목은 임팩트 있고, 본문도 꽤 괜찮습니다. “브랜드 경험 고도화”, “고객 접점 확대”, “운영 효율성 강화”, “콘텐츠 경쟁력 제고” 같은 말들이 빼곡하게 장표를 채우고 있습니다.

처음 보면 살짝 안심했다가 곧 다시 불안해집니다.
문장이 너무 반듯하고 어디서 많이 본 말들이 줄지어 있기 때문입니다. 틀린 건 아닌데, 이 프로젝트에서 나온 말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고객사 이름만 바꾸면 다른 제안서, 기획서 어디에나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내용들입니다.

확실합니다. 이건 AI가 다녀간 장표입니다.

AI를 썼다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저도 일할 때 AI를 쓰니까요. 잘 쓰면 분명 도움이 됩니다. 빈 장표 앞에서 몇 시간씩 멈춰 있는 것보다, AI 도움을 받아서라도 구조를 빨리 잡아오는 편이 나을 때가 많습니다. 특히 아직 기획서의 뼈대를 배우는 단계라면 첫 장의 빈칸이 주는 부담이 너무 크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어디서 시작해야 하는지, 고객사의 요구를 어떤 순서로 풀어야 하는지, 문제를 어떻게 나누고 시사점을 도출해서 제안으로 어떻게 연결해야 하는지. 보이지 않는 게 당연합니다. 그럴 때 AI는 묻기만 하면 목차도, 제목도, 전략 방향도 줍니다. 너무 잘 준다는 게 문제가 됩니다. AI는 빈칸을 그냥 두지 않고 뭐라도 채웁니다. 덕분에 장표는 허전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허전해 보이지 않는 것과 기획자의 생각이 들어 있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장표를 보다가 제가 자주 묻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장표에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요?”
이 질문을 던지면 회의실이 잠깐 조용해질 때가 있습니다. 장표에는 말이 많은데 만든 사람의 생각은 아직 닿지 않은 상태입니다. AI가 문장을 채우고, 팀원은 그 문장을 다듬었습니다. 하지만 이 장표를 왜 넣었는지, 이 흐름이 고객사에게 어떤 판단을 하게 만들려는지, 이 제안이 실제로 가능한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답답했습니다. 이걸 정말 생각하고 가져온 걸까. 고객사 상황을 대입해서 시뮬레이션은 해본 걸까. 이번 프로젝트에서 하면 안 되는 말과 해야 할 말이 뭔지 고민은 했을까.

그런데 조금 더 들여다보면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성실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어디가 비어 있는지 모르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모르는 부분이 빈칸으로 남았습니다. 빈칸이 남아 있으면 이 기획서를 쓴 사람이 어디를 모르는지 보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모르는 부분도 “핵심 전략”이나 “고객 경험” 같은 말로 덮입니다. 그러면 만든 사람도 자기가 어디를 모르는지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사라진 게 아니라 가려진 것이라서 더 까다롭습니다.

선배 입장에서도 난감합니다. 예전에는 허술한 초안을 보면 어디서 막혔는지 보였습니다. 첫 장을 못 쓰는지, 구조를 못 잡는지, 근거와 결론을 연결 못 하는 건지 빨리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겉보기에 쓸 만한 초안이 먼저 도착하기 때문에, 어디부터 알려줘야 하는지가 늦게 보입니다.

그래서 장표 하나를 보면서 세 가지를 동시에 생각하게 됩니다.

이 친구가 어디서 막혔나.
AI가 너무 잘 쓴 건가.
아니면 내가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건가.

장표 검토가 아니라 잡히지 않는 범인의 흔적을 더듬는 형사의 심정입니다.

“막히면 혼자 고민하지 말고 물어보세요”라는 말도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습니다. 막힌다는 사실을 말하려면, 자신이 어디서 막혔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경험이 적을 때는 그걸 말로 꺼내는 일부터 어렵습니다. 뭘 모르는지 모르고, 어떤 질문을 해야 할지 모르는데 그 상태에서 AI는 항상 대답해줍니다. 그러니 저에게 묻기 전에 팀원들은 AI와 오래 씨름하게 됩니다.

그 결과물이 저에게 옵니다. 문장은 반듯하지만 손댈 곳이 많습니다. 사실 어디를 손대야 할지 먼저 찾아야 합니다. 장표의 문제는 여러가지 일 수 있습니다. 문장, 구조 이해, 고객사 이해, 제안 방향 등 모든 것을 다시 봐야 합니다. 그럴 때마다 장표 뒤에 숨은 학습 상태를 보려고 합니다. 이 친구가 무엇을 모르는지, 무엇을 자기 판단으로 가져오면서 덮어버렸는지.

쉽지 않습니다. 장표를 보면 어긋난 부분이 바로 보이지만, 아직 배우는 사람에게는 어디가 어긋났는지도 모르는 게 당연합니다. 저는 “왜 이걸 못 보지?”라고 중얼거리다가 다시 생각합니다. 저는 20년 넘게 기획서를 써왔고, 팀원들은 기획서를 쓰기 시작한 지 아직 몇 년 되지 않았습니다. 가르치는 일은 원래 제 몫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회사 안에서도 가르치는 일은 결국 생깁니다. 특히 AI가 초안을 채워주는 시대에는 더 그렇습니다. 예전에는 빈칸을 채우는 법을 알려줘야 했다면, 이제는 채워진 말 중에서 무엇이 빈말인지 보는 법을 알려줘야 합니다.

이게 은근히 어렵습니다. AI가 만든 문장을 지우는 건 쉬운데, 왜 지워야 하는지 설명하는 게 어렵습니다. 그 문장 대신 자기 판단을 넣게 만드는 건 더 어렵습니다. 그래도 그 일을 해야 합니다. AI가 제목과 목차와 본문을 만들어줘도, 결국 기획서에는 만든 사람의 판단이 들어가야 합니다. 고객사의 요청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이 프로젝트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봤는지, 이 제안이 왜 지금 필요한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즘 초안을 볼 때 마음속으로 이런 질문을 자주 합니다.

이건 AI 생각이고, 네 생각은 대체 뭘까.


실제로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당하고 싶진 않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