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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님의 전성기는 언제였나요?

LIFE/일상의 기록

감독님의 전성기는 언제였나요?

산왕전에서 강백호는 안 감독에게 묻습니다.
감독님의 전성기는 언제였느냐고. 국가대표였을 때였느냐고. 자신은 지금이라고 말합니다.
허리를 다친 선수가 경기에 더 뛰게 해달라고 우기는 장면입니다. 
냉정하게 보면 운동선수에게 허리는 중요하고, 그 경기가 인생의 마지막 경기도 아닙니다.
그래도 그 장면을 보면서 강백호의 미래를 걱정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겁니다.
그에게 지금보다 중요한 순간은 없어 보였으니까요.

문득 제 전성기는 언제였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체력으로만 따지면 복학 직후였습니다.
아침에 축구를 하고 저녁에 다시 축구를 한 날도 있었습니다. 별다른 준비 없이 하프마라톤에 나가 21km를 완주한 적도 있습니다.
2박 3일을 안 자고도 버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시험 기간에는 실제로 그렇게 지냈고, 컨디션 난조로 시험도 말아먹었지만, 당시에는 2박 3일을 안 자고 버텼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당시의 저는 시험을 잘 보는 것보다 잠을 자지 않는 것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오후에 마시는 커피 한 잔을 신중하게 결정합니다. 밤에 잠이 오지 않으면 다음 날이 힘들고, 다음 날이 힘들면 그다음 날까지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20대에는 몸을 혹사하고도 젊음을 자랑했습니다. 지금은 잠을 잘 잔 날을 자랑합니다.

돈은 지금 가장 많이 법니다. 
직장 생활을 시작했던 22년 전과 비교하면 월급도 많이 올랐고, 회사에서 맡은 책임도 커졌습니다. 그런데 저를 위해 가장 많은 돈을 쓸 수 있었던 때는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아이도 없었고, 주택 대출도 없었습니다. 월급을 받으면 저축할 돈을 빼고 나머지는 비교적 자유롭게 썼습니다. 옷도 사고, 물건도 사고, 주말마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서 데이트를 했습니다. 제가 잘나서 시작한 연애는 아니었으니, 열심히 따라다니는 사람이 돈을 많이 쓰는 게 당연했습니다.
지금은 그때보다 많이 벌지만 한 달 용돈은 50만 원입니다. 월급이 들어오면 생활비와 보험료와 대출금과 아이들에게 필요한 돈이 먼저 각자의 용처를 찾아갑니다. 통장에는 큰돈이 지나가는데 제 손에는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가끔은 연애할 때 그 돈을 더 모았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산 옷과 먹은 음식과 놀러 다닌 비용을 계산하면 아까운 마음도 듭니다. 그래도 당시 데이트 비용을 아껴 적금에 넣었더라면 지금의 아내와 가족이 없을 가능성도 생각해야 합니다.

정서적인 전성기는 10년 전쯤이 떠오릅니다.
스마트폰을 사용했지만 모든 시간을 스마트폰 안에서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OTT가 많지 않았고, 집에 가만히 앉아 하루를 보낼 이유도 많지 않았습니다. 편함과 불편함이 애매하게 공존하던 시기였습니다.
볼 것이 없으면 밖으로 나갔습니다. 영화를 보러 가고, 서점을 돌아다니고, 새로운 가게를 찾아갔습니다. 온라인에서 본 것을 현실에서 확인하는 일이 아직 자연스러웠습니다.
지금은 반대입니다. 밖에서 본 것을 집에 돌아와 스마트폰으로 다시 찾아봅니다.
코로나를 지나며 집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생활에 익숙해졌습니다. 음식도 집으로 왔고, 회사 일도 집으로 왔고, 사람을 만나지 않고도 하루를 보낼 수 있게 됐습니다.
코로나가 생활을 바꿔놓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터널을 나온 지도 한참 됐는데 저는 아직 소파에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코로나만 탓하기 어렵습니다.
편리한 것은 더 많아졌습니다. 보고 싶은 것은 언제든 볼 수 있고, 필요한 물건은 다음 날 문 앞에 도착합니다.
아이 둘을 키우고 있고, 집과 회사에서 책임지는 일도 많아졌습니다. 친구와 연락하는 횟수는 줄었고,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대화보다 확인하고 처리해야 할 일이 먼저 떠오릅니다. 50대도 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나씩 따져보면 분야별로 전성기는 따로 있습니다.
체력은 20대였습니다. 돈을 자유롭게 쓸 수 있었던 때는 연애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밖으로 더 자주 나가고 사람과 세상을 만났던 때는 10년 전이었습니다. 소득과 경력은 지금이 가장 높습니다. 다만 그 소득과 경력이 언제까지 제 것일지는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AI는 제 일을 도우면서, 동시에 그 일이 앞으로도 제 일로 남을지를 스스로 질문하게 합니다. 

종합해보면 딱히 모든 것이 정점에 달했던 전성기는 없습니다.
한 시기에 있던 것은 다른 시기에는 없었습니다. 체력이 있을 때는 돈이 없었고, 돈을 쓸 수 있을 때는 지금의 가족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가족도 있고 돈도 벌지만, 시간과 체력은 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대단한 성공의 시기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누구나 알아볼 만한 일을 해낸 적도, 큰돈을 벌어본 적도 없습니다. 전성기라는 말을 붙이기에는 어느 시절도 약해 보입니다.

주말에 딸아이를 기숙사에 데려다주었습니다.
트렁크에서 짐을 내려주고 딸이 기숙사로 들어가는 모습을 봤습니다. 인사를 마친 뒤에는 아내와 작은아이를 데리고 잠시 외출했습니다.
어디 멀리 간 것도 특별한 구경을 한 것도 아닙니다. 볼일을 보고, 세 사람이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딸아이가 앉았던 자리는 비어 있었고, 작은아이는 뒷좌석에 있었습니다. 아내는 제 옆에서 운전을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이 제 전성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딸은 기숙사에서 생활하지만 주말이면 집으로 돌아옵니다. 작은아이는 아직 아빠와 엄마를 따라 외출합니다. 아내는 옆에 있고, 부모님도 계십니다.
저는 아직 일해서 돈을 벌고 있고, 가족과 주말마다 외출할 만큼은 건강합니다. 대출은 남아 있지만 돌아갈 집이 있습니다.

어느 하나 대단한 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상태가 언제까지나 계속되지는 않을 겁니다.
딸은 곧 대학에 가면 더 멀리 갈 겁니다. 작은아이도 엄마, 아빠와 함께 다니는 것보다 친구를 만나는 일이 좋아질 겁니다. 저와 아내도 지금보다 늙을 것입니다. 부모님이 계시고 아이가 아직 아이인 시간도 끝이 있습니다.

별일 없는 주말이었습니다.
아마 전성기는 그런 모습으로 지나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안에 있을 때는 월급과 체력과 자유 시간을 따로 계산하느라, 이미 가진 것들이 같은 날 한자리에 모여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합니다.

강백호는 자신의 전성기가 지금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아직 그렇게 단호하지 못합니다.
무릎도 예전 같지 않고, 용돈도 50만 원입니다.
그래도 지금이 어쩌면 저의 전성기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