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년 동안 세 번 속았다
저는 윈도 모바일 OS를 탑재한 디바이스를 세 번 샀습니다.
NEC 시그마리온(국내명 모디아), HP iPAQ, 그리고 삼성전자 옴니아.
세 번 다 후회했습니다.
2003년에 시그마리온, 2004년에 iPAQ 1940, 2008년에 옴니아.
5년 동안 세 번. 평균 1년 8개월에 한 번씩 같은 함정에 빠졌다는 뜻입니다.
학습 능력이라는 게 정말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신기한 건 한 번 후회하고 끝낸 게 아니라, 다른 폼팩터로 같은 OS를 다시 만났을 때마다 이번엔 다르겠지 하면서 또 샀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마이크로소프트의 마케팅에 약한 사람일까요.
이 글은 한 OS의 흑역사를 따라다닌 얼치기 얼리어댑터의 회고입니다.
NEC 시그마리온 - 가벼운 타이핑 머신이라는 환상
첫 만남은 2003년이었습니다. 대학생 때였죠.
한 선배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엄청나게 가벼운 타이핑용 노트북이 있으면 어떨 것 같아?"
그 말을 듣고 저는 도시바 리브레토를 떠올렸습니다. 손바닥보다 살짝 큰 사이즈에 완전한 윈도 환경.
그 시절 모바일 컴퓨팅의 로망이었습니다.
문제는 가격이었습니다. 대학생이 살 수 있는 가격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발견한 게 시그마리온이었습니다.
정확히는 한국에서 일본 NEC의 시그마리온 1을 수입해서 OS를 업그레이드한 한국 정식판 모디아라는 이름이었습니다.
가격은 수입사의 사정으로 많이 저렴했고 한글화도 돼 있었습니다.
저는 샀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은 지금 돌이켜 보면 차라리 리브레토를 사서 한글 윈도를 설치하는 게 100배 나은 선택이었을 정도로 후회되는 선택이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시그마리온 같은 기기는 정확히 말하면 PDA가 아니라 HPC, 핸드헬드 PC입니다. 같은 카테고리에 HP LX200, 조나다, NEC 시그마리온 같은 폼팩터가 다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게 PDA냐 HPC냐 따지기 시작하면 “그럼 형태가 비슷한 PMP와 UMPC는 어디에 끼워줘야 하느냐, 크기가 달라서 다른 기기라면 아이패드 미니와 아이패드 프로 13인치를 다른 기기로 부를 거냐” 같은 끝없는 카테고리 논쟁이 벌어집니다. 이기일원론과 이기이원론의 논쟁이 재현되는 건 원치 않으니, 일단 이 글에서는 윈도 CE 계열의 모바일 디바이스를 묶어서 풀어가는 걸로 하겠습니다.
뭐가 문제였을까요.
첫째, 윈도 CE라는 함정. 저는 윈도가 깔린 작은 노트북을 기대했는데, 윈도 CE는 그 윈도가 아니었습니다. 일반 윈도 프로그램은 거의 안 돌고, CE 전용 프로그램만 돌았습니다. 그 CE 전용 프로그램의 수와 질은 차마 입담기 어렵습니다.
둘째, 화면. 6.2인치 CSTN LCD에 640×240 해상도. 깜빡임이 있었고, 글자가 제대로 표현이 안됐고, 무엇보다 야외에서는 거의 안 보였습니다. 휴대성을 극대화한 HPC가 정작 야외에서 안 보인다는 것. 이게 가장 모순적인 단점이었습니다.
셋째, 확장 슬롯 하나. CF 카드 슬롯이 하나 뿐이었습니다. 메모리 확장을 위해 CF 메모리를 꽂으면 이더넷 카드는 못 꽂습니다. 이더넷 카드를 꽂으면 메모리 확장은 못 합니다.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구조.
저는 메모리를 택했고, 그래서 시그마리온으로 인터넷을 써본 적이 없습니다. (데스크탑에 시리얼 케이블로 연결하면 웹서핑이 된다고 하는데 데스크탑 앞에서 굳이 시그마리온으로 인터넷을 쓸 이유가 없습니다.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죠.)
OS는 Handheld PC 2000이었고, 포켓 아웃룩, 포켓 오피스, 포켓 익스플로러가 기본 탑재돼 있었습니다.
이 중 그나마 쓸 만했던 건 포켓 워드였습니다. 대학생 시절 리포트 초안을 시그마리온으로 많이 잡았습니다. 키보드 자체는 정말 만족스러웠거든요. 적절한 키압과 클릭감 덕분에 한글 입력은 좋았습니다.
키보드는 좋았는데 나머지가 다 발목을 잡았습니다.
결국 시그마리온은 진짜 그냥 타이핑 머신으로만 쓰게 됐습니다.
선배의 그 질문 "엄청나게 가벼운 타이핑용 노트북이 있으면 어떨 것 같아?"가 의도치 않게 시그마리온의 진짜 정체성을 정확히 예언한 셈입니다.
2004년, 대학교 4학년 때 가벼운 노트북(역시나 NEC의 VersaPro VY10F)을 구입하면서 자연스럽게 처분했습니다.
쓸만한 노트북이 따로 생기니, 시그마리온이 할 일이 없어졌거든요.
HP iPAQ 1940 - 두 번째 함정
시그마리온의 트라우마가 좀 옅어질 즈음 (사실 거의 옅어지지도 않았는데) 저는 또 윈도 모바일을 만났습니다.
바로 HP iPAQ 1940 입니다.
이번엔 핸드헬드 PC가 아니라 PDA 폼팩터였습니다. 손에 쏙 들어오는 사이즈. iPAQ은 그 시절 윈도 모바일 진영의 대표 PDA였죠.
저는 또 이번엔 다를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폼팩터가 바뀌었으니 사용 경험도 다르겠지. OS도 그 사이 좀 발전했겠지.
결과는 시그마리온과 거의 같은 종류의 실망이었습니다.
다른 점은 폼팩터뿐이었습니다. OS의 본질적인 한계는 그대로였습니다. 프로그램 부족, 야외 시인성 부족, 그리고 그 시절 Palm OS에 비해 모든 면에서 한 박자 느렸던 그 답답함.
저는 같은 시기에 소니 클리에 TG50도 가지고 있었는데 TG50을 훨씬 더 오래 들고 다녔습니다.
Palm OS의 깔끔함과 빠릿함을 한 번 경험하고 나면 윈도 모바일의 그 답답함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고문이었으니까요.
iPAQ는 어떻게 처분했는지 기억도 안 납니다. 그 정도로 인상이 옅었던 기기입니다.
삼성전자 옴니아 - 세 번째이자 마지막 함정
그리고 2008년 옴니아가 나왔습니다.
말 안 해도 다들 아실 겁니다. 한국 IT 역사상 가장 큰 흑역사 중 하나로 기록될 디바이스죠.
저는 또 샀습니다.
이번엔 그래도 명분이 있었습니다. 삼성이 만든 한국 시장 전용 모델이고, 아이폰의 대항마라 광고하고 있었고, 통신사 보조금까지 끼면 가격이 매력적이었거든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저는 그 시점에 또 "이번엔 다를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학습 능력이라는 게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결과는 시그마리온과 iPAQ의 모든 단점에 삼성 UI의 어색함이 더해진 디바이스였습니다.
소프트웨어적인 완성도가 너무 떨어졌고, 삼성이 윈도 모바일 위에 얹은 UI 레이어가 그 OS를 더 무겁고 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화면을 보면 정말로 우울했습니다.
이건 정말로 나오지 말았어야 할 제품이었습니다.
그래서 1년쯤 쓰다가 2009년에 블랙베리로 옮겼습니다.
그제야 윈도 모바일에서 벗어났습니다. 블랙베리도 결국 사라진 OS지만 적어도 자기 정체성은 명확했고, 그 정체성에 충실했습니다. 윈도 모바일에는 끝까지 없었던 그것 ‘자신이 어떤 디바이스인지에 대한 답’ 이 블랙베리에는 있었습니다.
윈도라는 이름이 가졌던 무게
지금 돌이켜 보면 왜 매번 또 샀을까 싶지만, 그 시절의 저에게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시절 OS의 선택지를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리눅스/유닉스 계열: 컨슈머용이라기보다는 서버용 OS에 가까웠습니다. 레드햇 같은 일반 컴퓨팅용 배포판이 있긴 했지만, 설치 자체가 어려웠습니다. 리눅스 깔아봤다가 그 자체로 무용담이 되던 시절입니다.
맥 OS: 너무 폐쇄적이었고, 디자이너들만 쓰는 OS라는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충무로 인쇄소나 잡지사에서 쿼크익스프레스 돌리려고 쓰는 컴퓨터. 그게 그 시절 맥의 이미지였습니다. 일반 사용자 입장에서 맥은 내가 살 컴퓨터가 아니라 전문가가 쓰는 컴퓨터였습니다.
그리고 MS 윈도: 마이크로소프트 윈도는 OS의 대명사였습니다. 수많은 개발자가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프로그램들이 있었고, 오피스 시리즈 같은 킬러 애플리케이션이 있었고, 인터넷 익스플로러나 미디어 플레이어 같은 기본 애플리케이션도 평타는 쳤습니다.
윈도가 깔린 디바이스면 적어도 중간은 가겠지라는 믿음이 그 시절에는 합리적인 추론이었습니다.
저는 그 신뢰를 모바일 디바이스에도 그대로 적용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만든 OS니까. 윈도라는 이름이 붙어 있으니까. 적어도 중간은 갈 거야.
문제는 윈도 CE라는 게 우리가 알던 그 윈도와는 완전히 다른 OS였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잠깐 계보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윈도 CE는 1996년에 임베디드/모바일용 OS로 처음 나왔습니다.
데스크탑 윈도(95/98/NT)와는 커널부터 다른 별개의 OS였어요. 이름만 윈도지 실제로는 다른 OS라고 보시면 됩니다.
윈도 모바일은 이 윈도 CE 커널 위에 얹힌 모바일 디바이스용 운영체제였습니다.
2000년에 Pocket PC 2000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해서 2003년에 윈도 모바일(WM)이라는 브랜드로 정착했고, 그 후 윈도우 모바일 6.5까지 버전업을 하다가 2010년에 단종됐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만난 세 디바이스 시그마리온, iPAQ, 옴니아의 OS는 다 같은 윈도 CE 커널의 변형들이었습니다.
폼팩터와 UI만 바뀌었지 본질은 같은 OS였습니다.
같은 함정이 5년 동안 세 번 반복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죠. 같은 커널이었으니까.
그런데 저는 매번 윈도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건 마이크로소프트의 브랜드 자산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 브랜드 자산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합니다.
소비자는 익숙한 이름에 무게를 둡니다. 익숙한 이름이 붙은 새 카테고리의 제품을 봤을 때 "짜장면을 잘 만드니까 당연히 짬뽕도 잘 만들겠지. 같은 중식당 아닌가?"라고 자동으로 가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OS는 그렇게 안 됩니다.
데스크탑 OS를 잘 만드는 것과 모바일 OS를 잘 만드는 것은 완전히 다른 역량을 요구합니다. 데스크탑 OS는 풍부한 자원에서 최대한의 기능을 짜내고, 모바일 OS는 제한된 자원에서 최소한의 기능을 매끄럽게 돌립니다. 정반대의 설계 철학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데스크탑 OS를 잘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PC 시장을 거의 독점에 가깝게 장악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회사가 모바일 OS는(1996년 윈도 CE 첫 출시부터 2010년 윈도 모바일 단종까지 14년 동안) 한 번도 제대로 만들지 못했습니다. 경량화도 실패했고, 확장성도 실패했고, UI도 실패했습니다.
저는 그 14년 중 5년 동안 같은 회사의 같은 이름을 믿고 세 번이나 같은 함정에 빠진 사람이고요.
선택지가 없는 시장은 별로인 제품도 살린다
같은 커널을 가진 OS가 14년 동안 같은 함정을 만든 데는 OS 자체의 문제뿐 아니라 시장 구조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 모바일을 14년 동안 끌고 갈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선택지가 적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iOS도 없고, 안드로이드도 없던 시절입니다.
특히 한국 시장에서는 통신사와 제조사 라인업의 한계 때문에 윈도 모바일 디바이스가 자주 등장했고, 그때마다 저 같은 사람이 이번엔 다를 거라고 생각하면서 또 샀습니다. 데스크탑용 윈도도 늘 잘한 건 아니지만 (윈도 밀레니엄 에디션... 비스타... 아아 머리가...) 버전업을 할 때마다 새로운 기능과 하드웨어 성능의 발전을 잘 커버하면서 진화해 왔거든요. 모바일도 그럴거라고 생각했죠.
마이크로소프트는 모바일 OS를 잘 만들어서 살아남은 게 아니라, 소비자에게 다른 선택지를 충분히 주지 않아서 살아남았던 겁니다.
그러다 아이폰이 출시되었습니다. 2007년이었죠.
그 시점부터 윈도 모바일은 빠르게 무너졌습니다.
소비자가 진짜 선택권을 가지자 모두가 다른 선택을 했거든요.
그리고 한 가지 깨달음이 옵니다.
선택지가 부족한 시장에서는 별로인 제품도 살아남습니다. 그것도 14년 동안.
그 14년 중 5년 동안 저 같은 사람이 세 번이나 같은 함정에 빠졌습니다.
지금의 IT 메인 시장이 통폐합돼서 재미없다는 이야기를 앞서 PDA 글에서 했었는데 지금 다시 보니 그 통폐합이 무서운 진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선택지가 줄어들면 살아남은 제품들이 별로여도 우리는 그 안에서만 골라야 합니다.
윈도 모바일 같은 OS가 14년 동안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이유 그게 지금 메인 스트림 디바이스 시장에서도 똑같이 작동하고 있지 않을까요?
에필로그
저는 지금도 노트북을 살 때 가끔 손이 움찔합니다.
MS 서피스 ARM 라인업을 볼 때 특히 그렇습니다.
이번엔 진짜 다를 거 같은데? 라는 생각이 자동으로 듭니다. CPU는 x86 계열이 아닌 ARM 계열 스냅드래곤을 쓰지만 윈도와 완전히 동일하다는 말을 들으면 왠지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파블로프의 개 같은 반사 작용을 알아차린 순간 저는 시그마리온과 iPAQ과 옴니아를 떠올립니다.
그 세 디바이스가 나이 들어버린 저의 가장 충직한 경고등 역할을 하는 셈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좋은 회사고 좋은 제품도 많이 만듭니다. 안 써봤지만 서피스 프로 X도 좋은 제품일 겁니다.
다만 저는 더 이상 "이번엔 다를 거야"를 믿지 않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