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은 구글이나 네이버보다 AI에게 더 많이 묻습니다. 검색창에 단어 몇 개를 넣는 대신 상황을 길게 설명하는 식입니다. 그러다 보니 검색 기록 대신 채팅 제목이 남게 됩니다.
최근 일주일 동안 만든 채팅 제목을 차례대로 읽어봤습니다.
주민이 벽에서 죽는 이유
카레 보관 기간
아이 발열 대처법
맥미니 서버 구축
발 아치 깔창 효과
각막 상처 회복 과정
블로그 기능 개선 제안
오늘 업무 확인
제안서 분석 요청
제목만 보면 적어도 세 사람이 함께 사용하는 계정 같습니다.
‘주민이 벽에서 죽는 이유’는 아이와 마인크래프트를 하다 생긴 질문입니다.
서버 터미널 창에 주민이 벽에서 질식했다는 메시지가 계속 떴습니다. 마을 어딘가에서 주민들이 반복해서 희생되고 있었고, 서버 관리자인 저는 원인을 찾아야 했습니다. 회사에서는 플랫폼 운영을 하는데, 집에서는 아이가 만든 마을의 주민 생존율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다음 날에는 냉장고에 남은 카레를 먹어도 되는지 물었습니다. 만든 뒤 바로 냉장 보관했고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괜찮아 보였지만, 아이가 먹을 음식이라 한 번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아이가 열이 났습니다. 채팅 목록에는 ‘카레 보관 기간’ 바로 아래에 ‘아이 발열 대처법’이 남았습니다.
기록만 보면 제가 상한 카레를 먹여놓고 AI에게 사후 대책을 묻는 것처럼 보이지만, 카레가 원인이었다는 근거는 없었고 아이도 해열제를 먹고 다음 날 괜찮아졌습니다. 남은 카레는 제가 먹었습니다. 절반은 증거인멸이고, 절반은 아까워서입니다.
그다음 채팅 제목은 ‘맥미니 서버 구축’입니다. 아이가 괜찮아졌으니 다시 마인크래프트로 돌아간 것입니다. 아빠의 걱정은 크지만 관심사는 빠르게 복구됩니다.
며칠 뒤에는 아이가 다리를 자주 아파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오래 걸으면 발과 다리가 아프다고 했고, 키도 또래보다 잘 크지 않는 편이어서 발 아치를 잡아준다는 깔창이 도움이 될지 찾아봤습니다. 아빠는 ‘교정’이라는 단어에 약합니다. 아직 크게 잘못된 것은 없어도 바로잡을 수 있다고 하면 일단 읽어봅니다.
그다음에는 학교에서 아이가 눈을 다쳤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채팅 제목은 ‘각막 상처 회복 과정’이 됐습니다. 눈을 다쳤다는 말에 놀랐지만, 각막 표면은 비교적 빨리 회복되는 편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안약을 넣고 하루가 지나자 금세 좋아졌습니다.
아이가 괜찮아진 뒤부터 채팅방 제목은 다시 직장인답게 바뀝니다.
블로그 기능 개선 제안.
오늘 업무 확인.
제안서 분석 요청.
채팅 목록만 보면 아빠와 직장인이 교대로 나타납니다.
그사이에 마인크래프트 서버 관리자도 잠깐 끼어 있습니다.
AI는 원래 회사 일을 하려고 결제했습니다.
제안서를 분석하고, 자료를 찾고, 문서를 검토하는 데 쓰려 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쓰고 있습니다. 다만 최근 기록을 보면 회사 업무보다 아이에 관한 질문이 더 자주 눈에 띕니다.
고등학생 딸과 초등학생 아들을 키우고 있으니 부모 경력은 짧지 않습니다. 이제는 웬만한 일에 익숙할 때도 됐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열이 나면 다시 체온계 숫자를 확인하고, 다리가 아프면 깔창을 알아보고, 눈을 다치면 각막이 며칠 만에 낫는지 묻습니다.
아이들이 자랄수록 아빠도 능숙해질 줄 알았습니다. 큰아이 키울 때는 알았는데 작은아이 키우면서 잊은 것도 있습니다. 신생아를 재우는 법을 겨우 익혔더니 이유식을 먹여야 했고,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자 친구 관계와 게임 서버가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고등학생 기숙사 생활까지 알아야 합니다.
육아 경력은 쌓이는데 담당 업무는 계속 바뀝니다. 그동안 늘어난 것은 답보다 질문인 것 같습니다.
예전보다 놀라는 일은 적어졌지만, 구체적으로 걱정하는 법은 더 잘 알게 됐습니다. 막연히 “괜찮을까”에서 끝나지 않고, 귀 체온은 몇 도인지, 각막 표면은 얼마나 빨리 회복되는지, 발 아치 깔창이 실제로 도움이 되는지를 묻습니다. 질문만 고도화되었습니다.
일하려고 결제한 AI를 열어놓고 가장 자주 하는 일은 아빠로서의 업무였습니다.
아직 다음 채팅방 제목은 없습니다.
아이들이 조용하니 아마 회사 일이 될 것 같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