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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적었던 날

LIFE/나의 취향

사진이 적었던 날

얼마 전, 작은아이와 둘이 인사동에 갔습니다.

아이가 여덟 살이 되면서 같이 사진 찍으러 다니는 재미가 생겼습니다. 예전에는 카메라를 들이대면 금방 딴짓을 했는데 이제는 잠깐 기다려줍니다. 그래서 둘이 나가는 날에는 웬만하면 카메라를 챙깁니다.

그날도 카메라를 현관까지 꺼내놨는데, 마침 비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우산을 챙기고, 장화를 신기고, 아이 옷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는지 카메라는 현관장 위에 그대로 뒀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가방을 열어보고서야 알았습니다.

비 오는 인사동이면 찍을 만한 장면이 많을 텐데 싶어 아쉬웠습니다. 아이폰이 있으니 사진을 못 찍는 건 아니지만, 제가 좋아하는 사진은 찍는 것보다 집에 돌아와 보정하는 데 더 많은 재미가 있습니다.

아이와 우산을 쓰고 골목으로 들어갔습니다.
“여기로 가면 어디로 나와?”
아이는 골목에 들어설 때마다 물었습니다. 제가 별생각 없이 길을 알려주자 신기해했습니다. 아빠가 인사동 길을 전부 외우고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이보다 조금 컸을 때부터 혼자 돌아다니던 낙원상가와 인사동이라 길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그런 기억 때문인지 걷다가 저의 옛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여기는 엄마가 좋아하던 가게가 있던 자리인데 지금은 없어졌다고, 저기는 아빠가 예전에 같이 사진 찍던 친구들과 자주 만나던 가게였다고 알려줬습니다. 민들레 영토라는 가게였는데, 지금은 아이가 좋아하는 배스킨라빈스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이가 아빠의 옛날에 별 관심이 없을 줄 알았는데, 역사 이야기라도 듣는 것처럼 진지하게 들었습니다.
“내가 크면 여기 또 다른 가게가 될지도 모르겠네?”
그럴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난 여기 배스킨라빈스가 있는 게 좋아. 여기까지 왔는데 아이스크림 가게가 하나 있으면 좋잖아.”
엉뚱한 말이라 웃었습니다. 아빠가 친구들을 만나던 자리가 아이에게는 아이스크림 가게로 기억될 겁니다. 저에게 그 골목이 그랬듯, 아이에게도 이 골목이 언젠가 옛날이 되겠지요.

한참 걷다가 아이가 물었습니다.
“근데 왜 엄마랑 둘이서만 왔어? 나랑 누나는 왜 안 데려왔어?”
그때는 너희가 없었다고, 아빠랑 엄마 둘만 있던 시절이라고 괜히 변명하듯 설명했습니다. 아이는 8살이 되어서도 엄마 아빠의 옛날에 자기가 없었다는 게 잘 납득되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길에서 패치를 파는 가게를 발견하고는 하나만 사달라고 졸랐습니다. 평소 같으면 안 사줬을 텐데 그날은 잔뜩 사서, 캐리어에 붙이는 이름표를 만들어줬습니다. 그런데 고른 패치가 죄다 제주도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제주도 가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습니다.
“응. 아빠랑 엄마랑 같이 갔었잖아.”
그 여행이 2년 전이었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휴가다운 휴가를 썼던 때이기도 합니다. 그 뒤로 아이는 엄마와 영국에도, 일본에도, 마카오에도 다녀왔습니다. 저보다 훨씬 멀리 다녔습니다.
그런데 제주도 패치를 고르는 걸 보니 괜히 그 여행이 떠올랐습니다.
그게 조금 미안해졌습니다.

비가 오는데도 아이는 잘 따라왔습니다. 집에서는 밥 한 숟갈 더 먹이기 힘든 녀석이 길에서 사준 것은 곧잘 먹어서, 평소라면 지나쳤을 것도 몇 가지 더 사줬습니다.

집에 돌아와 몇 장 찍지 않은 아이폰 사진을 정리하면서 예전에 카메라를 들고 나갔던 날의 사진도 다시 봤습니다. 아이가 예쁘게 나온 사진이 많았습니다. 어디에 갔는지도, 무엇을 먹었는지도 사진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아이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카메라를 들고 나간 날, 저는 아이에게 자주 말했습니다.
“우리 여기서 한 장 찍자.”
아이가 이제 그만 찍고 싶다고 툴툴거리면, 나중에 보면 다 기억에 남는 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 기억에 남은 것은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뿐이었습니다. 사진 속에서 아이와 저는 여기저기 많이 다녔는데, 둘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생각나지 않습니다. 기억을 카메라에 외주 준 셈입니다.

이번에는 아이폰으로 찍은 사진 몇 장뿐입니다. 그래도 아이가 골목마다 어디로 이어지느냐고 묻던 것, 아빠 옛날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다가 엉뚱한 소리를 하던 것, 제주도 패치를 골라서 미안했던 것이 다 기억납니다.
카메라를 두고 나온 게 아쉽지 않은건 아닙니다. 몇 번이나 여기서는 카메라로 찍었으면 좋았을 텐데 싶었고, 다음에 나갈 때는 챙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카메라를 들면 저는 아이를 잘 찍기 위해 봅니다. 표정이 괜찮은지, 구도에 맞게 서 있는지.

그날은 그냥 아이와 우산을 쓰고 옆에서 걸었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