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ter

새 글을 메일로 받아보세요

한 달에 한 번, 그달의 글을 추려 보내드립니다.

메일로 구독하기
글을 쓰고 나면 일상이 기다리고 있다

LIFE/일상의 기록

글을 쓰고 나면 일상이 기다리고 있다

친구 이야기를 하나 썼습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친구였습니다. 글을 쓰려고 마지막으로 나눈 카톡 대화를 다시 읽었고, 친구의 인스타그램을 다시 들어가보고, 그때의 일을 하나씩 떠올렸습니다. 평소라면 문득 생각났다가 흘려보냈을 기억인데 문장으로 옮기다 보니 한참 다시 더듬게 됐습니다.

글은 담담하게 마무리하고도 마음은 그때 기억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문병을 가지 않았던 일을 다시 후회했고, 장례식장에서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친구의 가족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것도 떠올랐습니다. 몇 달 지난 일인데 글을 쓰는 동안에는 과거가 현재로 가까이 다가옵니다. 당시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까지 뒤늦게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어떤 글은 쓰기 전보다 쓰고 난 뒤가 더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 상태로 거실에 나갔는데 아내에게 잔소리를 들었습니다.
욕실을 썼으면 제대로 치우라는 겁니다. 방금 전까지 삶과 죽음에 대해 꽤 심각한 생각을 하고 있던 저에게는 사소한 일입니다. 당연히 제 사정은 아내가 알 리 없고, 저도 굳이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킨 일을 하고, 아이가 부르면 대답하고, 저녁에 뭘 먹을지 이야기하다 보니 무거웠던 마음이 어느새 다른 곳으로 가 있었습니다. 친구에 대한 미안함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글을 쓰면서 다시 떠오른 기억도 그대로 남았지만 그것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게 됐습니다.
제 일상에는 아내도 있고 아이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를 생각하면 이런 일이 꽤 아이러니합니다.
한동안 제대로 살고 있는 게 맞나 하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열심히 일했고 살아왔지만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무엇을 남겼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사에서 한 일은 다음 프로젝트에 덮였고, 바쁘게 지나간 하루는 며칠만 지나도 별 흔적 없이 기억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별일 없이 지나갔다고 생각했던 하루를 다시 꺼내보면 의외로 많은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아이와 나눈 대화도 있었고, 오래된 물건 하나에도 예전의 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적다 보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힘들었는지 나중에서야 알게 된 적도 있습니다.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사는 것 같았는데, 막상 글로 적어보니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글을 쓰는 일은 그런 면에서 일상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됐습니다. 하루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한 번 더 바라볼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별것 아닌 일은 재미있는 기억이 되어 돌아오지만, 후회했던 일이나 떠난 사람을 쓰는 날에는 마음이 다시 힘들어지기도 합니다. 글이 삶을 정리해주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럴 때 저를 현재로 데려오는 것은 반복되는 일상입니다. 아내가 다급하게 부르기도 하고, 아이가 문을 열고 들어와 엉뚱한 질문을 합니다. 밥시간이 되면 먹어야 하고, 다음 날 아침이면 또 출근해야 합니다.

그런 일상의 반복이 답답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가끔 그 반복 덕분에 너무 오래 한 생각에 머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글을 쓰면서 지나간 일을 다시 읽어 볼 겁니다. 어떤 날은 재미있을 테고, 어떤 날은 다시 힘들 겁니다. 그래도 방문을 열고 나오면 일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안할 일이 생기고, 별것 아닌 말에 짜증도 냅니다. 웃다가 또 서운해지고, 오래전 일을 생각하면서 마음이 가라앉아도 오늘 저녁에 가족들과 뭘 먹을지는 정해야 합니다.

제가 사는 곳은 여기입니다.
한참 다른 시간을 들여다보다가도 결국 돌아와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와 웃는 곳.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