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년 동안 몰랐던 은행의 이해
저는 은행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금을 한다. 은행은 그 예금을 모아둔다. 누군가 대출을 받으러 오면, 은행이 모아둔 돈에서 일부를 빌려준다. 그 대가로 이자를 받는다. 은행은 예금 이자보다 대출 이자를 높게 책정해서 그 차이로 돈을 번다.
평생 살면서 이게 은행의 작동 방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통장에 돈을 넣으시면서 "은행이 이 돈을 모아서 필요한 사람한테 빌려주는 거야"라고 하셨던 그 설명이 머릿속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이해를 의심해본 적이 없습니다. 너무 당연하게 느껴졌으니까요.
그런데 챗GPT와 대화하면서 이게 사실과 다르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정확히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정반대였습니다.
대출이 먼저, 예금이 나중
GPT가 던진 명제는 이거였습니다.
현대 경제에서 돈(예금)은 대체로 은행이 대출할 때 새로 만들어진다.
처음 읽었을 때 좀 어리둥절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가 안 됐다고 할까요? 다시 읽고, 또 다시 읽었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은행이 누군가에게 1억 원 대출을 승인하면 그 1억 원이 은행이 보관하던 예금에서 오는 게 아니라, 차주(대출자)의 계좌에 1억 원이라는 숫자가 새로 찍힙니다. 동시에 은행의 장부에는 1억 원짜리 대출채권이 새로 생깁니다. 즉 같은 순간에 양쪽에서 동시에 1억 원이 생겨난 겁니다. 은행의 부채(차주의 예금) 1억 원, 은행의 자산(대출채권) 1억 원. 양쪽 다 무에서 생긴 겁니다.
은행이 누군가의 예금에서 끌어와 빌려준 게 아니라, 대출이라는 행위 자체가 새로운 예금을 만든 거죠.
이걸 처음 읽었을 때 솔직히 좀 황당했습니다.
그러면 은행은 돈을 무한정 만들 수 있다는 건가? 그건 화폐 발행이랑 뭐가 다른가? 이게 정말 맞는 이야기인가?
신용이 곧 화폐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니 이 명제가 사실은 지난 1편과 2편에서 얻은 깨달음들과 다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1편에서 저는 "금융은 망하지 않는 구조를 만드는 게임이다"라는 문장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 화폐의 본질에 대해서도 정리했죠. 화폐는 신용에 기반한 약속이라는 것. 옛날엔 금이나 은처럼 실물 가치가 있는 화폐를 썼지만, 지금은 국가의 신용이 보증하는 종이돈을 쓰고 있고, 그 종이돈조차 점점 사라지고 디지털 숫자로만 존재하는 시대라는 것.
이 관점에서 다시 보면 은행이 대출할 때 차주의 계좌에 찍히는 1억 원이라는 숫자도 사실 같은 성질입니다. 그 1억 원이 어디 금고에 보관된 실물이 아닙니다. 차주의 신용을 평가한 결과로 만들어진 숫자입니다. 차주가 갚을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니까 그 신용을 화폐로 전환해주는 거죠.
그러니까 은행은 돈을 빌려주는 회사가 아니라, 신용을 화폐로 전환하는 공장입니다.
신용이 먼저 있고, 신용을 평가한 결과로 화폐가 생성된다. 담보, 상환능력, 현금흐름이 화폐 창출의 근거가 된다.
그동안 저는 화폐를 실물처럼 생각했습니다. 통장에 찍힌 숫자는 어딘가에 보관된 진짜 돈을 대표하는 거라고 막연히 믿었습니다. 그런데 현대 경제에서 돈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더군요. 돈은 신용의 표현이고, 은행은 그 신용을 숫자로 바꿔주는 장치였습니다.
그러면 왜 은행은 무한정 돈을 못 만드나
당연히 의문이 생깁니다.
은행이 대출을 통해 새 화폐를 만들 수 있다면 왜 은행은 무한정 대출을 해주지 않나. 왜 시중에 돈이 무한정 늘어나지 않나.
답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차주의 신용입니다. 은행은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만 대출을 해줍니다. 신용이 없는 사람에게 무리하게 대출을 해주면 그 대출은 부실채권이 되고, 결국 은행이 손실을 봅니다. 그러니까 은행은 차주의 신용이라는 한계선 안에서만 화폐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둘째, 규제입니다. 중앙은행과 금융당국은 은행이 자기자본 대비 일정 비율 이상 대출을 하지 못 하도록 규제합니다. 자기자본 비율, 대출 한도, 지급준비율 같은 장치들 말이죠. 이 규제가 은행이 신용 창출을 무한정 못 하게 막는 안전장치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무거운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 안전장치가 작동하지 않거나, 규제가 느슨해지면 은행은 신용을 과도하게 창출하게 되고, 그게 결국 거품과 위기를 만든다는 것.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그 사례였습니다. 미국의 은행들이 갚을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도 주택담보대출을 마구 내주면서 신용을 과잉 창출했고, 그 신용이 결국 부실로 드러나면서 금융 시스템이 통째로 흔들렸죠.
은행이 신용을 화폐로 전환하는 공장이라면 그 공장이 폭주할 때 경제 전체가 위험해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금융위기는 도덕 문제가 아니라 구조 문제다
저는 그동안 금융위기 뉴스를 볼 때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은행이 욕심을 부려서 사고를 쳤구나." "탐욕스러운 금융인들이 일을 망쳤다."
헤드라인도 보통 그런 식으로 잡힙니다. 누가 잘못했고, 누구를 처벌해야 하고, 누가 책임져야 한다.
그런데 은행이 신용을 화폐로 만드는 구조라는 걸 알고 나니, 금융위기가 도덕 문제가 아니라 구조 문제라는 게 보였습니다.
은행이 신용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은 본래 정상적인 기능입니다. 그게 없으면 경제가 돌아가지 않습니다. 기업이 공장을 짓고, 개인이 집을 사고, 사회가 투자를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신용을 화폐로 바꿔줘야 합니다. 은행이 그 일을 합니다.
문제는 그 능력이 폭주할 때입니다. 그리고 폭주는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 설계의 문제입니다. 규제가 느슨하면, 인센티브 구조가 잘못 깔려 있으면, 위험을 평가하는 방식이 무너지면, 은행은 구조적으로 신용을 과잉 창출하게 됩니다. 개별 은행원이 욕심을 부려서가 아니라 시스템이 그렇게 작동하니까요.
그래서 금융위기 후 항상 따라오는 게 규제 강화입니다. 욕심을 처벌하는 게 아니라, 폭주가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시스템을 다시 설계하는 것이죠.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또 규제가 느슨해지거나 틈이 생기고, 또 신용이 과잉 창출되고, 또 위기가 옵니다. 이게 반복되는 구조인 거죠.
저는 금융위기를 모럴 해저드로만 봤습니다. 누가 나쁜 짓을 했고, 누가 처벌받아야 한다.
그런데 사실은 시스템 설계의 문제였습니다. 시스템이 폭주하면 누구라도 그 폭주에 휩쓸리는 거죠.
이걸 알고 나니 금융 뉴스를 보는 시선이 또 한 단계 달라졌습니다. 헤드라인의 분노가 아니라, 그 뒤에 있는 구조를 보려 하게 됐습니다. 누가 잘못했는가가 아니라, 어떤 시스템이 이 사건을 만들었는가.
다음 편에서는 이러한 생각과 연결되는 또 다른 발견을 풀어보겠습니다.
"부동산이 안전한 진짜 이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국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 생각해봤을 주제일 겁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