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소기를 세워둔 채로
몇 달 전 주말에 집에서 청소기를 돌리고 있었습니다.
손과 다리는 바닥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지만, 머리 속 한구석에는 며칠째 풀리지 않은 일이 하나 생각을 따라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고객사의 사업계획안.
며칠을 붙들고 있었는데 마땅한 답이 안 나왔습니다. 여러 번 AI에게 여러 각도로 물어봐도 답이 만족스럽지 않았고, 저 자신도 뭔가 간질간질한데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답이 없었다기보다, 아직 제 안에서 충분히 무르익지 않은 상태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청소기를 돌리던 중에 갑자기 생각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청소기를 세워두고 노트를 펼쳤습니다.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떠오른 생각들을 적어 내려갔습니다.
며칠 동안 붙잡고 있던 문제가, 이상하게도 청소기 소리 사이에서 한 번에 정리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순간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아이디어는 책상 앞에서, AI 화면 앞에서, 회의실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청소기를 돌리던 멍한 순간에 나왔습니다.
그러면 단순 작업을 하며 멍하게 보내던 시간은 사실은 무엇보다 필요한 시간이었던 게 아닐까.
효율이 좋아졌다, 처음엔 그랬다
저는 챗 GPT가 일반에 공개된 시점부터 AI를 써왔습니다. 4년 가까이 된 셈입니다. 오래 써서 잘 쓴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제 업무에 AI를 녹여오면서 나름의 최적화를 해왔습니다.
가장 크게 달라진 건 시간이 생겼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루 업무를 돌이켜보면 단순 반복 작업의 비중이 생각보다 컸습니다.
정리, 요약, 비교, 초안 작성, 자료 검토. 이런 작업들이 AI로 옮겨가면서 시간이 꽤 확보됐습니다.
그 시간을 더 중요한 일에, 또는 평소에 하고 싶었지만 못했던 일에 쓸 수 있게 됐습니다. 이 블로그도 그렇게 시작한 일 중 하나입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말하는 AI의 효용입니다. 저도 그렇게 느꼈고 그게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일의 시작이 바뀌었다
어느 순간부터 일의 시작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책상에 앉으면 머릿속에 워크플로가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일부터 시작하고, 어떤 순서로 풀어가고, 어떤 결과물을 만들 것인지. 자연스럽게 그 흐름을 따라 손이 움직였습니다.
22년 동안 일하면서 몸에 밴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일의 시작이 AI에게 묻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아이데이션 단계부터 AI에게 던집니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 메시지는 무엇이 좋을까", "이 방향에서 어떤 접근이 가능할까".
처음에는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깨달았습니다. 저는 사고의 첫 순간을 AI에게 외주 주고 있었습니다.
머릿속에 정리되어 있던 워크플로가 점점 흐트러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예전이라면 책상에 앉자마자 떠올랐을 첫 아이디어가 이제는 AI 화면을 먼저 봐야 떠오릅니다.
정확히는, AI의 답을 본 후에야 제 생각이 반응합니다.
그러면 그건 제 생각일까요, 아니면 AI의 답에 대한 반응일까요.
별 것 아닌 순간이 생각을 밀어 올린다
인지심리학에는 마인드 원더링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주의가 눈 앞의 과제에서 잠시 벗어나 기억과 감정과 미해결 문제가 느슨하게 이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겉으로 보면 멍 때리는 시간입니다. 청소기를 돌리던 그 주말 이후로 멍 때리는 순간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됐습니다.
하루 업무 중에는 단순 반복 작업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손은 움직이는데 머리는 다소 멍한 순간들.
자료를 정리하거나, 표를 옮기거나, 비슷한 문장을 여러 번 다듬는 그런 시간.
효율의 관점에서 보면 그 시간은 낭비입니다. AI가 처리해주면 훨씬 빠릅니다.
그런데 그 멍한 시간이 사실은 필요한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손이 단순 작업을 하는 동안 머리는 잠시 풀려납니다. 그 풀려난 상태에서 다른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며칠 전 회의에서 못 풀고 넘어간 문제가 다시 떠오르거나,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새 관점이 갑자기 보이거나, 전혀 관계없어 보이던 두 생각이 연결됩니다. 손은 단순 작업을 하고 있지만 머리는 느슨한 사고를 이어가고 있는 시간.
청소기를 돌리던 그 주말의 아이디어도 그런 시간에 나왔습니다.
손은 청소를 하고 있었고 머리는 일에서 풀려나 있었습니다.
그 풀려난 상태에서, 며칠 동안 책상 앞에서 안 잡히던 답이 떠올랐습니다.
이게 우연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단순 반복 작업을 하는 멍한 시간이 사실은 사고가 정리되는 시간이었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시간이었던 것 아닐까.
그리고 AI는 우리가 효율적으로 일하도록 도와주면서, 동시에 그 멍한 시간을 빼앗아간 것 아닐까.
효율의 끝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나
AI가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느낀 건 좀 달랐습니다. AI는 아직 일자리를 빼앗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제 업무에서는 말이죠.
AI가 가져간 건 일하는 사이사이의 멍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멍한 시간이 사실은 사람이 자기 머리로 사고하고, 의외의 연결을 발견하고, 새로운 관점을 잡는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효율과 여백은 동전의 양면 같습니다. 우리는 효율을 얻기 위해 여백을 잃었습니다.
책상 앞에서 보내는 시간은 효율적으로 돌아갔지만, 일을 떠나 잠시 멍하게 있을 시간은 줄어들었습니다. 또는, 책상을 떠나도 머리는 여전히 AI의 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진짜로 일에서 풀려나는 시간이 줄어든 거죠.
현재 우리 직장인의 일상에는 AI로 효율을 높이자는 메시지가 사방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효율의 대가가 무엇인지는 아직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줄어든 만큼 무엇이 줄어들었는지, 빨라진 만큼 무엇이 사라졌는지.
저는 그게 멍한 시간이라고 느낍니다.
그리고 그 멍한 시간이 사실은 일이 가장 깊이 진행되던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즉, AI로 인해 줄어든 것은 업무 시간이 아니라 생각이 혼자 자유롭게 방황할 수 있는 시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고 AI를 안 쓸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미 AI 없이 일하던 방식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건 솔직히 인정합니다.
다만 요즘은 의식적으로 여백을 만들려는 시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AI에게 첫 질문을 던지기 전에 잠시 스스로 생각해보는 시간을 둡니다.
머릿속에서 답이 안 나와도 10분 쯤은 혼자 끙끙대 봅니다.
단순한 정리 작업을 일부러 AI에게 안 넘기고 직접 합니다.
손이 단순 작업을 하는 동안 머리속의 생각이 풀려나는 그 여백을 일부러 남겨두는 겁니다.
비효율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비효율 안에서 생각이 풀릴 때가 있습니다.
거창한 결론은 아닙니다.
그저 청소기를 세워둘 수 있는 시간을 다시 만드는 일입니다.
AI로 효율을 얻는 대신, 생각이 방황할 수 있는 작은 여백을 남겨두는 것.
가끔 인사이트는 대단한 장소나 상황이 아니라, 별 것 아닌 순간 속에서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