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글에 이어서
지난 글에서 은퇴와 연금 사이의 5년을 정리하면서 젊을 때의 돈은 불리는 돈이고, 은퇴 이후의 돈은 꺼내 쓰는 돈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이 한 줄을 이해하고 글로 표현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시기에 따라 투자의 룰이 달라진다는 건 너무 당연한 말인데, 막상 제가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금융을 따로 공부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저 오랜 시간 직장을 다니면서 매달 월급을 받고, 대출을 갚고, 보험에 들고, 가끔 적금을 깨면서 살아왔을 뿐입니다. 그래서 노후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도 막연히 돈을 많이 모아야 한다 정도로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그게 노후 준비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걸 최근에야 알게 됐습니다. 노후 준비는 단순히 얼마를 모을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모은 돈을 언제부터, 얼마씩, 얼마나 오래 꺼내 쓸 수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정리해보려 합니다.
두 시기의 게임이 다르다
젊은 시기의 금융은 비교적 단순합니다.
얼마를 벌 것인가.
얼마를 모을 것인가.
얼마나 빠르게 자산을 키울 것인가.
이 시기에는 수익률이 중요합니다. 변동성도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습니다. 손실이 나도 다시 벌 시간이 있고, 다시 모을 소득이 있고, 다시 시도할 여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젊을 때는 시간을 자기 편으로 둘 수 있습니다. 시장이 하락해도 기다릴 수 있고, 월급으로 추가 매수할 수도 있고, 실패한 선택을 회복할 시간도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은퇴 이후는 다릅니다.
이 시기에는 자산을 크게 키우는 것이 핵심이 아닙니다. 모아둔 자산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얼마나 오래, 얼마나 예측 가능하게 꺼내 쓸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해집니다.
같은 1억이라도 30대의 1억과 60대의 1억은 완전히 다른 돈입니다.
30대의 1억은 시간을 통해 더 커질 수 있는 씨앗입니다. 시장이 흔들려도 기다릴 수 있고, 손실이 나도 앞으로의 소득으로 메울 수 있습니다.
60대의 1억은 다릅니다. 이 돈은 기다리는 돈이 아니라 매달 생활비로 바뀌어야 하는 돈입니다. 시장이 나쁘다고 해서 식비, 관리비, 병원비를 3년 뒤로 미룰 수는 없습니다.
이걸 다르게 말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젊을 때의 금융은 자산을 만드는 게임이고, 은퇴 이후의 금융은 자산을 흘려보내는 게임이다.
끝나는 시점을 모른다
누군가 저에게 은퇴 이후 게임의 난이도를 대폭 올리는 조건을 한 가지 꼽으라면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내가 언제까지 살지 모른다는 것.
다른 자산은 보통 끝이 정해져 있습니다. 자녀 교육 자금은 자녀가 졸업할 때까지입니다. 주택 대출은 만기가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노후 자산만은 끝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70세까지 살지, 80세까지 살지, 90세까지 살지, 100세까지 살지 알 수 없습니다. 의학이 발전할수록 이 불확실성은 오히려 커집니다. 오래 사는 것은 분명 좋은 일입니다. 다만 돈의 관점에서는, 내가 예상한 기간보다 삶이 길어질 때 자산 계획이 무너질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금융에서는 이런 문제를 장수 리스크라고 부릅니다. 오래 사는 것이 위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내가 예상한 기간보다 삶이 길어질 때, 돈이 먼저 끝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오래 사는 축복이 돈의 관점에서는 예측하기 어려운 변수로 바뀌는 셈입니다.
예를 들어 80세까지 살 것이라 가정하고 자산을 설계한 사람이 92세까지 산다면 어떻게 될까요. 마지막 12년의 생활비는 어디서 나와야 할까요. 게다가 이 12년은 의료비와 간병비가 더 커지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걸 생각하면서 저는 노후 자산의 진짜 위험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내가 살아 있는 시간보다 돈의 시간이 먼저 끝나는 것.
이게 노후 자산이 가진 가장 큰 불확실성인 것 같습니다.
하락장이 언제 오느냐도 중요해진다
여기에 한 가지 변수가 더 있습니다. 시장이 언제 흔들리느냐도 중요해진다는 것입니다.
젊을 때는 시장이 하락해도 시간이 해결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매달 소득이 있고, 추가로 투자할 수 있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자산을 모으는 시기의 하락장은 괴롭지만, 길게 보면 더 낮은 가격에 자산을 살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은퇴 이후에는 같은 하락장이 다르게 작동합니다.
자산을 팔아 생활비를 마련해야 하는 시점에 시장이 나쁘면, 손실이 회복되기 어렵습니다. 기다리는 동안에도 생활비는 계속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시장이 회복될 때까지 버티고 싶어도, 매달 써야 할 돈은 계속 필요합니다.
결국 은퇴 이후에는 평균 수익률만큼이나 손실이 찾아오는 순서가 중요해집니다. 자산을 모으는 시기에는 하락장이 기회가 될 수 있지만, 자산을 꺼내 쓰는 시기에는 하락장이 치명적인 변수가 될 수 있습니다. 같은 하락장이라도 어느 시기에 만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은퇴 이후의 금융은 얼마나 많이 벌 것인가보다, 나쁜 시기에 얼마나 덜 무너질 것인가가 더 중요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도구가 달라야 한다
이 차이를 이해하면, 노후 자산을 다루는 도구가 왜 젊을 때와 달라야 하는지가 조금 보이기 시작합니다.
젊을 때의 도구는 보통 수익률과 유연성으로 평가됩니다. 얼마나 수익률이 높은가, 얼마나 자유롭게 사고팔 수 있는가. 그래서 주식, 펀드, ETF, 부동산 같은 도구들이 활용됩니다. 시장 상황에 따라 사고팔 수 있고, 분산 효과를 가질 수 있는 상품도 있고, 장기적으로 자산이 커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도구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공통점은 자산을 키우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입니다.
은퇴 이후의 도구는 기준이 다릅니다. 수익률보다 얼마나 끊기지 않고 들어오는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가, 변동성이 얼마나 적은가 같은 조건이 더 중요해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예상보다 오래 살아도 계속 지급될 수 있는지가 중요해집니다.
이 기준에서 보면, 자산을 키우는 도구와 현금흐름을 만드는 도구는 사뭇 다른 성격을 가진 것 같습니다.
자산을 키우는 도구들은 시장이 좋을 때 자산을 늘리는 데 강합니다. 주식이나 ETF는 자유롭게 사고팔 수 있고, 분산 효과를 가지기도 하고, 장기적으로는 물가 상승을 따라잡을 수도 있습니다. 펀드도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이런 도구들의 공통적인 한계는 시장이 나쁠 때 손실이 나고, 인출 시점을 잘못 잡으면 회복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자산이 언제 바닥날지도 알 수 없습니다.
현금흐름을 만드는 도구들은 정반대 성격을 가졌습니다. 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 같은 연금 상품이 대표적입니다. 이런 도구들은 선택의 여지 없이 장기 투자를 해야 하고, 중간에 자유롭게 꺼내 쓰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정해진 시점부터 일정한 현금흐름을 만들어줍니다. 특히 살아 있는 동안 계속 지급되는 종신형 연금은 내가 예상보다 오래 살아도 생활비가 완전히 끊기지 않도록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 외에도 배당주, 월지급식 펀드, 임대 부동산처럼 일정한 현금흐름을 만들 수 있는 도구들이 있습니다. 다만 이런 도구들은 시장 상황에 따라 흐름이 흔들릴 수 있다는 점에서, 연금만큼 안정성이 보장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산을 키우는 도구는 기회를 위한 것이고, 현금흐름을 만드는 도구는 실패를 막기 위한 것이다.
둘은 같은 게임안에서 수익률로 경쟁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서로 다른 문제를 푸는 도구들입니다. 자산을 키우는 도구들은 자산을 늘릴 기회, 물가 상승을 따라갈 기회를 줍니다. 현금흐름을 만드는 도구들은 너무 오래 살아서 돈이 먼저 끝나는 위험, 시장이 나쁠 때 생활비가 끊기는 위험을 줄여줍니다.
그래서 어느 하나만 선택하는 것보다는, 두 종류의 도구가 노후에서 각각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다르게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젊을 때는 자산을 키우는 도구가 더 중요할 수 있지만, 은퇴가 가까워질수록 현금흐름을 만드는 도구의 의미가 커집니다.
자산 규모가 아니라 현금흐름
여기까지 정리하다 보니, 노후 준비에 대해 그동안 제가 생각하던 방식 자체가 조금 바뀌었습니다.
저는 노후 준비를 자산 규모로만 생각해왔습니다. 5억을 모았는가, 10억을 모았는가, 집이 있는가, 금융자산이 얼마인가. 그게 노후 준비의 척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리즈를 정리하면서 한 가지가 더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은퇴 이후의 삶은 자산 총액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매달 쓸 수 있는 돈으로 굴러갑니다.
노후에 필요한 것은 숫자로 찍힌 큰 자산이 아니라, 매달 끊기지 않고 들어오는 생활비일지도 모릅니다. 집값이 얼마인지보다 그 집에서 살면서 매달 어떤 현금흐름을 만들 수 있는지가 중요해집니다. 금융자산이 얼마인지보다 그 자산을 팔지 않고도 생활비를 만들 수 있는지가 중요해집니다.
그래서 노후 준비의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얼마를 모을 것인가에서, 매달 얼마를 안정적으로 만들 것인가로.
결국 노후 준비는 자산을 크게 만드는 일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자산을 예측 가능한 현금흐름으로 바꾸는 과정까지 포함해야 합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고 나니, 노후 준비는 통장에 찍힌 숫자를 키우는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숫자를 매달의 생활비로 바꾸는 구조입니다. 결국 노후 준비의 마지막 질문은 자산이 얼마인가가 아니라, 이 자산이 내 삶의 끝까지 현금흐름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에 가까웠습니다.
이 차이를 이해한 게 저에게는 금융 공부 시리즈를 정리하면서 얻은 가장 큰 발견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글에서는
그런데 노후 자산을 생각하다 보면 결국 다시 현재의 문제로 돌아오게 됩니다. 은퇴 이후에 얼마를 꺼내 쓸 수 있느냐는, 지금 얼마나 모으느냐뿐만 아니라 지금 어떤 부채를 안고 있느냐와도 연결됩니다.
자산을 만드는 속도보다 부채가 줄어드는 속도가 느리다면, 노후 현금흐름은 생각보다 쉽게 막힐 수 있습니다.
우리 직장인 대부분에게 부채는 일상의 일부입니다. 그런데 부채가 단순한 짐인지, 아니면 도구인지에 대해서는 의외로 정리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바로 이 부채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