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의 난가(爛柯)
20년 전 주니어 시절 이사님들을 떠올려봅니다.
파티션으로 가려진 모니터 한 구석에는 바둑이나 고스톱 등이 실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태만함을 탓하기보다 무료한 인생의 황혼기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요즘 에이전시의 이사는 생각보다 바쁩니다.
거창하게 말하면 늘 의사결정의 연속이고, 솔직하게 말하면 하루 종일 여기저기서 오는 메시지를 막고 줍고 다시 던지는 사람에 가깝습니다. 더 쉽게 설명하면 숨가쁜 눈싸움 같습니다. 다만 고객사는 안전하게 받아야 하고, 제가 맞으면 엄청 아프다는 점에서 물리적인 비대칭 전장, 즉, 기울어진 운동장이죠.
일상에 많은 시간을 쓰기가 어렵습니다. 사고의 리소스도 마찬가지입니다.
퇴근 후에도 머리는 쉽게 꺼지지 않고, 주말에도 다음 주의 일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래서 느린 경험 소비라는 트렌드가 와닿았습니다.
아... 이제야 깨닫습니다. 그 시절 이사님들은 무료한 시간을 그저 보내는 게 아니라, 난가(爛柯)의 고사를 실천하는 현인들이었던 겁니다.
느리게 머물고, 천천히 먹고, 조용한 풍경을 보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소비한다는 것.
생각만 해도 좋아 보였습니다. 일상을 잠깐 끊어내고, 가족과 고즈넉한 곳에서 쉬는 장면이 그려졌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가족과 시간을 보내야겠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예약해야겠다.
여기서부터 시작됐습니다.
가격표 앞에서 침몰한 첫 상륙정
느린 경험을 위해 저는 검색을 시작했습니다.
한적하고 고즈넉한 펜션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숲이 있고, 마당이 있고, 창밖에 물이 흐르거나 산이 보이는 곳. 아이들이 조금 뛰어놀 수 있고, 어른은 커피를 들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는 곳. 너무 화려하지는 않지만, 사진을 보면 왠지 마음이 정돈되는 곳.
요즘 검색 엔진은 이런 욕망을 너무 잘 압니다.
검색 결과에는 제가 원하던 장면들이 가득했습니다.
나무로 된 테라스, 흰 침구, 노천탕처럼 보이는 작은 온수풀, 조용한 조명, 감각적인 식기,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여백.
일상과 분리된 무릉도원 같은 펜션들이 줄지어 나타났습니다. 사진만 보면 이미 저는 조금 쉬고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상륙정은 검색 결과 첫 페이지에서 격침됐습니다.
가격 때문이었습니다.
'잠깐, 이건 5성급 호텔 스위트룸보다 비싼데?'
처음에는 제가 잘못 본 줄 알았습니다.
1박 가격인가, 2박 가격인가. 인원 기준이 다른가. 혹시 성수기인가. 아니면 객실이 아니라 독채 전체를 사는 건가.
하지만 다시 봐도 가격은 그대로였습니다. 느린 시간은 생각보다 비쌌습니다.
아주 천천히 쉬려면, 아주 빠르게 현실 감각을 잃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이해는 됩니다. 좋은 공간은 관리비가 들고, 인테리어도 돈이 들고, 청소와 운영과 예약 시스템도 비용입니다.
한적함은 공짜로 생기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노동과 투자 위에 만들어집니다.
문제는 제가 찾고 있던 것이 휴식이었는데, 첫 화면에서 마주친 것은 부동산 감정평가에 가까운 숫자였다는 점입니다.
옵션이라는 이름의 다음 전장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불리한 전황을 뒤집기 위해 적의 사령부에 잠입하는 심정으로 찾고 또 찾았습니다.
마침내 저는 어느 정도 합리화 가능한 가격대의 펜션을 찾아냈습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괜찮아 보였습니다. 사진도 나쁘지 않았고, 풍경도 일상과 분리된, 정지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느려 보였습니다. 물론 업체 사진을 그대로 믿는 것은 소개팅 앱에서 상대방 사진을 그대로 믿는 일과 비슷한 위험이 있다는 조언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저는 이미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져 있었습니다.
'이 정도면 이 악물고 합리화할 수 있겠다.'
그렇게 5부 능선은 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다음 전장의 이름은 ‘옵션’이었습니다.
기본 숙박료는 그럭저럭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약 페이지를 조금 더 내려가자 작은 글씨들이 나타났습니다.
바비큐 그릴 이용료. 숯과 장작 비용. 온수풀 온수 추가 비용. 기준 인원 초과 비용. 침구 추가 비용. 반려동물 동반 비용. 얼리 체크인과 레이트 체크아웃 비용. 불멍 세트 비용. 조식 비용. 청소비. 때로는 보증금.
저는 알아버렸습니다. 느린 경험은 하나의 가격이 아니었습니다.
조각난 가격들의 조립품이었던 겁니다.
처음에 보았던 가격은 입장권에 가까웠고, 제가 상상한 장면들은 대부분 추가 결제 영역에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려면 온수 비용이 붙고, 저녁에 바비큐를 하려면 그릴 비용이 붙고, 가족들이 조금 더 편하게 자려면 침구 비용이 붙습니다. 쉬러 가는 일에도 체크박스가 많았습니다.
이쯤 되니 약간 속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속은 것은 아닐 겁니다. 다 적혀 있었습니다. 제가 작은 글씨를 늦게 봤을 뿐입니다.
하지만 느린 경험을 찾다가 옵션표를 읽고 있으면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
저는 천천히 쉬고 싶었는데, 어느새 부대비용을 계산하는 회계 담당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진짜 전장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약이었습니다.
예약 전쟁, 그리고 패배
이쯤 되면 느린 경험 소비가 아니라 윤회의 고통입니다.
예전에는 성수기와 비수기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여름휴가철, 연휴, 명절, 크리스마스, 새해. 그때만 피하면 조금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괜찮은 숙소에는 비수기가 없는것 같습니다.
주말은 당연히 없고, 금요일도 없고, 평일도 애매하게 차 있습니다. 제가 원하는 날짜는 이미 누군가가 가져갔습니다. 3개월 뒤까지 예약이 꽉 차 있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잠깐 멍해졌습니다.
느린 시간을 사려면 이렇게 빨라야 하는구나.
누군가는 알림을 걸어두고, 누군가는 예약 오픈 시간을 기다리고, 누군가는 취소표를 줍고, 누군가는 이미 다음 계절의 휴식을 선점합니다. 느린 경험은 느린 사람에게 오지 않았습니다. 누구보다 빠른 사람이 먼저 가져갔습니다.
결국 저는 ‘느린 경험 소비’라는 전쟁에서 패배했습니다.
패잔병의 독기로 후기를 검색했습니다. 어차피 예약도 못 했으니, 이제 제가 찾고 싶은 것은 하나였습니다.
'그렇게 고생해서 갔는데 별로였다'는 후기.
기대보다 좁았다든지, 사진과 달랐다든지, 주변이 시끄러웠다든지, 벌레가 많았다든지, 온수풀이 미지근했다든지.
사람은 참 이상합니다. 내가 얻지 못한 것을 조금 덜 좋아 보이게 만들 근거를 찾기 시작합니다.
여우의 신포도임을 너무 잘 알지만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정신이 버틸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물론 불만 후기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승리자들의 자축이었습니다.
잘 쉬고 왔어요. 아이들이 너무 좋아했어요. 풍경이 정말 예뻤어요. 다음에 또 가고 싶어요. 조용하고 힐링됐어요.
그들은 해냈습니다. 느린 경험 소비를 위해 누구보다 빠르고 강했던 사람들.
검색을 통과하고, 가격을 받아들이고, 옵션을 계산하고, 예약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들.
그들은 마침내 조용한 테라스에 앉아 느린 시간을 얻었습니다.
저는 그들의 후기를 읽으며 빠르게 지쳤습니다.
느린 경험 소비 도전기는 그렇게 피폐한 몸과 마음만 남기고 끝났습니다.
느리기 위해 빨라야 하는 역설
이쯤에서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정말 느린 시간을 사는 걸까. 아니면 느린 척하는 시간을 사기 위해, 더 빠르고 더 복잡한 과정을 통과하고 있는 걸까.
느림은 경쟁의 반대편에 있는 말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느린 경험 소비의 세계에서는, 빨리 찾고 빨리 예약하고 빨리 결제한 사람만이 느릴 자격을 갖습니다.
느린 사람은 느린 시간을 얻지 못합니다.
뭐, 이걸 전부 업체 탓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좋은 공간은 한정돼 있고, 사람이 몰리면 예약은 당연히 어려워지니까요.
수요와 공급이 불균형한 시장이 돌아가는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다만 그 시장 안에서 우리는 느리기 위해 빨라야 하는 상태가 됩니다.
굳이 사고실험까지 안 가도, 광속에 가까울수록 시간은 느려지는 특수상대성 이론이 현실에서 재현되는 모습에 아인슈타인도 무릎을 쳤을 겁니다.
쉬려고 공간을 고르다가 쉬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합니다. 느린 시간을 얻기 위해 마음이 먼저 빨라집니다.
저는 여기서 조금 허탈하게 웃고 말았습니다.
가족과 조용한 시간을 보내겠다고 마음먹고, 오마하 해변에 상륙하는 병사처럼 펜션 예약 페이지를 뚫고 있었습니다.
느린 손길의 상륙정은 가격표 앞에서 침몰했고, 살아남은 병사는 옵션표에서 부상을 입었고, 예약 달력 앞에서 결국 후퇴했습니다.
저는 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쉬기 전에 이미 지쳤습니다.
제가 찾던 것은 멋진 펜션이 아니라, 아무 계획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가족과 어디론가 가고 싶었던 게 아니라, 가족과 함께 있을 때 회사 생각을 덜 하고 싶었습니다.
창밖의 숲보다 먼저 필요했던 것은, 제 머릿속의 소음이 조금 줄어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여행을 포기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잘 만든 펜션의 조용한 거실, 물소리, 나무 냄새, 늦은 아침은 분명히 힘이 있습니다. 저도 여전히 그런 곳에 가고 싶습니다.
다만 이제는 덜 휘둘리고 싶습니다. 느림은 공간의 속성이기 전에, 제가 그 시간에 무엇을 내려놓을 수 있는지의 문제일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니 다음에는 조금 다르게 해보고 싶습니다.
검색을 덜 하고, 비교를 덜 하고, 사진을 덜 믿고, 후기에 덜 흔들리는 방식.
완벽한 숙소를 찾기보다, 적당한 장소에서 마음을 덜 들고 가는 방식.
예약에 실패했다고 하루가 실패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방식.
느린 시간을 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먼저 배워야 할 것은, 느린 시간을 사는 법이 아니라 느린 사람이 되는 법이었습니다.
아니면 누구보다 빠른 손길, 강인한 인내, 그리고 재력일수도요.
곧 휴가철인데 저는 아직 숙소를 예약하지 못했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