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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행사의 일은 어디서 끝나는가 - 자식 같던 폼보드를 떠올리며

WORK/조직과 일

대행사의 일은 어디서 끝나는가 - 자식 같던 폼보드를 떠올리며

대행사로 일하다 보면, 가끔 욱하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옵니다.

오래 전 제가 담당했던 고객사 내부 성과 보고용 폼보드를 만들던 날이 그랬습니다.

고객사 담당자가 윗선에 우리가 이만큼 했습니다. 하고 보여줄 자료였는데, 디자인도 제작도 배달도 결국 우리가 했습니다.

 

만들면서 예전에 봤던 만화의 대사가 입 안에 계속 맴돌았습니다.

“왜 너희가 똥싸는데, 내가 힘을 주어야 하느냔 말이다.”

 

물론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습니다. 안 할 수가 없는 일이기도 했고요. 따지고 보면 그 보고는 우리를 대행사로 계속 쓸 당위성을 설명하는 자리였습니다. 우리 밥줄을 지키기 위해 예쁘게 포장해서 갖다 바치는 셈입니다. 그러니 남의 공치사에 우리가 힘을 줄 수밖에요.

 

PPT와 폼보드는 다르다

문제는 폼보드라는 물건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저는 PPT 디자인은 제법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자신 있게 덤볐습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을 A2 폼보드에 옮기니, 감이 영 달랐습니다.

 

왜 그럴까 한참 생각했습니다. 제가 만드는 PPT는 결국 A4 용지만 한 화면에서 들여다보는 느낌입니다. 코앞에서 보는 것이죠. 그런데 폼보드는 회의실 벽에 세워두고, 멀찍이 앉은 임원의 눈에 한 번에 꽂혀야 합니다. 거리감이 다릅니다.

크기만의 문제는 아니었을 겁니다. PPT도 큰 화면에 띄울 때가 있으니까요. 다만 화면에서는 슬쩍 넘어가던 허점이 종이 위에서는 이상하게 더 잘 보였습니다. 전문 디자이너가 아니라 정확한 이유는 모릅니다. 그런데 제 시안은 어딘가 허전했습니다.

결국 혼자 다 만들겠다는 욕심을 접고, 회사 디자이너들의 손을 빌렸습니다.

 

시안이 나왔습니다. A3 프린터로 뽑아 벽에 붙이고, 한 발 떨어져서 봤습니다.

제가 만든 것과 뭐가 구체적으로 다르냐고 물으면 딱 짚어 말하긴 어렵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더 짜임새 있고, 더 괜찮아 보였습니다.

디자이너가 아닌 저는 그저 이게 더 낫다는 정도만 알아보면 되는 것 아닌가, 하고 어깨를 으쓱했습니다.

 

폼보드는 고칠 수 없는 매체다

폼보드는 인쇄물입니다. 나중에 수정하고 파일명 끝에 진짜 끝을 더하고 저장 버튼을 누를 수 있는 화면이 아닙니다. 한 번 출력하면 끝입니다. 그래서 문장 하나, 이미지 표현 하나, 그래프 하나를 핥듯이 살펴야 했습니다.

 

살피다 보니 고칠 곳이 의외로 많습니다. 오타가 두어 군데, 틀린 그래프, 잘못 들어간 이미지.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시간은 새벽으로 흘러가는데, 같이 검수하는 디자이너들은 내용의 맥락을 모릅니다. 결국 전체를 다 아는 제가 하나하나 찾아야 했습니다.

미안했습니다. 저 때문에 다들 새벽까지 못 들어가고 있는 것이.

엄밀히 따지면 저 때문이 아니라 고객사 때문이죠. 하지만 붙잡고 있는 건 접니다. 다행히 그 정도의 인성은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결국 새벽 3시가 되어서야 최종 검수와 제작이 끝났습니다.

24시간 운영하는 킨코스에 전화해 폼보드 인쇄를 요청하고, 아침에 찾으러 가기로 한 뒤 퇴근했습니다.

 

비 오는 날, 자식 같은 폼보드를 모시고

폼보드를 찾으러 가는데 비가 내렸습니다. 오늘 일진 안 좋다, 생각하며 집을 나섰습니다.

처음으로 마주한 A2 사이즈 폼보드는 생각보다 컸습니다. 그리고 불안했습니다.

종이처럼 부드럽게 휘는 게 아니라, 가운데에 스티로폼 심을 넣고 종이를 덧댄 구조라 두께가 있습니다.

그래서 잘못 힘을 주면 휘는 게 아니라 쿠쿠다스처럼 부서집니다. 바람 한 번 세게 불면 툭 꺾일 것 같았습니다.

 

원래 계획은 회사로 가져와 퀵서비스로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토바이 퀵이든 다마스 퀵이든, 이게 멀쩡히 도착할지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밤을 새워 만든 자식 같은 폼보드가 운송 중에 부러져 일개 쓰레기로 전락하는 상상을 하니, 도저히 남의 손에 맡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비닐로 싸고 스카치테이프로 꽁꽁 두른 뒤, 제가 직접 배달하기로 했습니다.

 

택시를 탔습니다. 제 몸보다 폼보드를 소중히 모셨습니다.

닿으면 부서질까, 흔들리면 꺾일까, 택시의 작은 진동에도 신경이 곤두섰습니다.

비가 오니 우산을 폈는데, 제 머리가 아니라 폼보드 비닐 위에 씌웠습니다.

고객사 로비에 들어섰을 때 제 꼴은 아마 말이 아니었을 겁니다. 쫄딱 젖었으니까요.

 

폼보드를 직접 가져왔다니까 담당자가 놀랐습니다.

"퀵으로 보내지, 비오는 날 뭐하러 여기까지 들고 오셨어요."

그 순간 다시 목 끝까지 욱하는 말이 올라왔습니다.

그그 너흐들 뜨문이즈느.” 다행히 이번에도 삼킬 수 있었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내부 보고 하셔야 하는데, 혹시라도 파손될까 봐 걱정돼서 직접 가져왔습니다."

마음에 없는 말을 조형하고 뱉어내는 순발력이 있다는게 그 순간 참 다행스러웠습니다.

 

담당자는 제가 그렇게 모시고 온 폼보드를, 비닐에 붙은 테이프를 손잡이 삼아 덜렁덜렁 들고 갔습니다. 마음에 안 들었지만 어쩌겠습니까. 이미 제 손을 떠난 물건인데요. 자식을 떠나보내는 기분이 잠깐 들었지만, 감상은 접고 회사로 돌아가는 택시를 불렀습니다.

 

폼보드가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덕분에 내부 보고는 잘 마쳤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저는 또 다른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그 자식 같던 폼보드가 가끔 생각납니다.

철야하다 회의실 바닥에 잠깐 누웠는데, 등으로 올라오는 냉기가 너무 차서 아, 그거라도 한 장 깔고 누웠으면 싶을 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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