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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에도 회의가 끝나지 않는다

WORK/조직과 일

퇴근 후에도 회의가 끝나지 않는다

집에 와서 아이와 놀고 있는데, 머릿속에서는 낮에 끝난 회의가 다시 펼쳐질 때가 있습니다.
오늘도 그랬습니다. 
 
아이는 이제 아빠 차례라며 빨리 그리라고 재촉합니다. 
저는 스케치북을 내려다보다가, 회의에서 하지 못한 말을 떠올립니다. 
그때 이렇게 말했어야 했나. 답변이 너무 방어적으로 들리지 않았을까. 고객사 담당자가 고개를 갸웃한 건 이해하지 못해서였을까,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이었을까.
 
아이는 제 앞에 있습니다. 회의는 이미 끝났습니다. 그런데 제 안에서는 층위가 바뀝니다. 
아이의 목소리는 잠깐 멀어지고, 낮에 끝난 말들이 더 또렷해집니다.
 
몸이 집에 있으면, 저는 집에 있는 걸까요.
 
저는 이런 걸 책임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을 대충 넘기지 않는 태도, 놓친 것을 다시 확인하는 습관. 그렇게 이름 붙이면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습니다. 
퇴근 후에도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적어도 무책임한 사람은 아닐테니까.
그런데 문득 이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임감이 아니라, 불안을 성실함이라고 부르고 있는 건 아닐까.
 
낮에 끝난 회의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때 하지 못한 말은 하지 못한 말로 남고, 고객사 담당자의 표정도 이미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저는 집에 돌아와 그 장면을 다시 돌려봅니다. 
이번에는 더 차분하게 설명해보고, 담당자가 반박하면 더 확실한 근거를 얹어 대답해봅니다. 
혼자서 회의를 다시 하는 셈입니다.
 
문제는, 이 사고 실험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내일 할 수 있는 일은 메모해두고, 다시 확인할 내용은 아침에 보면 됩니다. 
그런데 저는 거기서 멈추지 못합니다. 할 수 있는 일과 이미 지나간 일을 잘 나누지 못합니다.

손으로 하던 일은 노트북을 덮으면 끝납니다. 그런데 머리로 하던 일은 간단히 닫히지 않습니다. 
아이의 연필이 스케치북을 채우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저는 회의에서 헐거웠던 문장을 다시 짓습니다.
이 생각을 끊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가끔 쓸모가 있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쓸모없는 걱정이라면 버리기 쉬울 텐데, 퇴근 후의 생각은 실제로 문제를 미리 발견하기도 하고, 더 나은 기획의 밑바탕이 된 적도 있습니다. 
 
그 몇 번의 경험 때문에 저는 또 머릿속에서 회의를 엽니다. 
이 때 쓸데없는 불안이 꼼꼼함으로, 일을 놓지 못하는 마음이 잘하려는 마음으로 포장됩니다.
 
가장 미안한 사람은 아이입니다. 
아이는 제가 집에 왔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집에 있습니다. 밥을 먹고, 옆에 앉아 고개도 끄덕입니다. 
하지만 제 머릿속에서는 아직 회의의 말들이 오갑니다.

이게 싫어서 일을 잊으려 애써본 적도 있습니다. 
이제 그만 생각하자. 퇴근했으니 끝이다. 
그런데 밀어내려 할수록 낮의 대화가 더 선명해집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코끼리가 생각나는 것처럼요.
 
생각은 명령한다고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가 할 수 있는 건 일을 완전히 지우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문제를 미리 따져보고, 생각을 다시 정리하고, 내일의 위험을 줄이는 건 제 일의 일부니까요.
 
하지만 그 생각이 저녁 전체를 가져가게 두어선 안 됩니다. 
머릿속 회의가 다시 열리더라도, 그것이 아이의 그림보다 커지면 안 됩니다. 
제가 하지 못해 아쉬웠던 말이, 지금 제 앞에 있는 아이의 말을 밀어내면 안 됩니다.
 
아이가 다시 재촉합니다. 
아빠는 이제 우주선을 그려. 비밀 기지에서 탈출하려면 우주선이 필요해.
 
그때 저는 돌아옵니다. 낮에 끝난 회의에서, 지금 제 앞에 놓인 스케치북으로. 
오늘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퇴근은, 아이가 내민 연필을 제대로 받아드는 겁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