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하다가 좋은 자료를 발견하면 저는 일단 즐겨찾기에 넣습니다.
읽지는 않습니다. 직장인의 품위랄까요.
지금은 바쁘고, 회의가 있고, 보고서 마감이 있고, 이미 열어둔 탭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 자료는 분명 좋아 보입니다. 언젠가 제안서의 논리로 쓸 수 있을 것 같고, 기획서 아이디어로 풀 수 있을 것 같고, 블로그 글감으로도 발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장합니다.
읽은 것도, 소화한 것도, 제 문장으로 정리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즐겨찾기 폴더에 넣고 나면 일을 한 것 같습니다.
링크 하나를 저장했을 뿐인데, 저는 자료 리서치를 끝낸 사람의 기분이 됩니다.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기분입니다.
브라우저의 즐겨찾기는 성실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미래의 저에게 일을 떠넘기는 장치에 가깝습니다.
지금 읽기 어려우니 저장하고, 지금 판단하기 어려우니 애매한 폴더명을 붙입니다. 그러고는 생각합니다. 나중에 몰아서 봐야지.
그런데 나중은 좀처럼 오지 않습니다.
아, 가끔은 옵니다. 제안서를 쓰다가, 예전에 저장한 그 자료가 있었는데, 하고 즐겨찾기 폴더를 엽니다.
그 순간 기대합니다. 오래전 묻어둔 보물을 찾으러 가는 사람처럼요.
그런데 다시 열어본 즐겨찾기에는 그때의 감동만 있고, 지금의 쓸모는 없습니다.
정보가 이미 낡았거나, 내용이 애매하거나, 처음엔 대단해 보였는데 다시 읽으니 별 게 없습니다.
제목은 그럴듯한데 열어보면 광고성 리포트고, 비주얼과 타이틀은 진지한데 결국 세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그것도 이미 제가 알고 있던 내용입니다.
그래도 당시의 저는 분명 흥분했을 겁니다. 이건 언젠가 쓸 수 있겠다.
직장인에게 언젠가 쓸 수 있겠다는 말은 꽤 강한 주문입니다.
책상 서랍의 충전 케이블도, 외장하드의 오래된 폴더도, 브라우저의 즐겨찾기도 대부분 그 주문 아래 살아남습니다.
지금은 쓸모없지만 언젠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말은, 케이블과 파일과 하이퍼링크에게 생명 연장의 기회를 줍니다.
제 브라우저에는 그런 폴더가 꽤 많습니다. 일부를 살펴보면 대략 이렇습니다.
제안서 참고. 시장 자료. 좋은 사례. UX. 콘텐츠 전략. 미디어 트렌드. 인문학. 중요 자료. 임시. 포스트 코로나.
폴더 이름만 봐도 저는 꽤 체계적인 사람입니다.
폴더를 만든 사람이 저이고, 그 폴더를 열지 않는 사람도 저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입니다.
그래도 가끔은 목록만 봐도 흐뭇합니다. 즐겨찾기가 길게 내려오면 왠지 지식이 축적된 것 같습니다.
아직 읽지 않았지만, 여기 있다는 사실만으로 든든합니다.
자료를 가진 사람과 자료를 이해한 사람은 분명 다른데, 즐겨찾기 앞에서는 그 차이를 잠깐 흐린 눈으로 바라봅니다.
저는 자료를 모으는 지식 노동자라기보다, 도토리를 묻어놓고 위치를 잊어버리는 사무직 다람쥐에 가깝습니다.
다람쥐는 겨울을 대비해 도토리를 묻는다고 합니다. 저는 제안서를 대비해 링크를 묻습니다.
다람쥐가 모든 도토리를 되찾지는 못하듯, 저도 모든 링크를 다시 열지는 못합니다.
다람쥐가 숲에 나무를 퍼뜨리듯, 저는 브라우저에 폴더를 퍼뜨립니다.
생산성 면에서 다람쥐에게 진 것 같지만, 뭔가 했다는 흔적은 남습니다.
지우기도 어렵습니다. 다시 보지 않을 걸 알면서도 지우기는 아깝습니다.
이 링크를 지우는 순간, 언젠가 이 자료를 멋지게 써먹을지도 모르는 미래의 저까지 같이 지우는 것 같습니다.
자료가 아까운 게 아니라, 그 자료의 가능성이 아깝습니다.
그래서 6년 전부터 남아 있는 폴더도 있습니다.
그 안의 링크들은 아직도 조용히 기다립니다.
언젠가 선택받은 기획자가 나타나 제안서를 향해 휘두르길 기다리는 엑스칼리버처럼요.
하지만 왕은 좀처럼 오지 않습니다.
그 존재를 떠올리더라도 대개 마감 전날 밤이라, 왕에게는 엑스칼리버를 찾으러 모험을 떠날 여유가 없습니다.
오늘도 저는 좋은 자료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읽어보려다가 쓸 만해 보인다는 인상만 받았습니다.
지금 읽기에는 조금 길었고, 그냥 닫기에는 또 조금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또 즐겨찾기에 넣었습니다.
폴더는 제안서 참고로 정했습니다. 그 폴더에는 이미 참고되지 못한 자료들이 많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직장인의 즐겨찾기는 실제로 쓰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읽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이자, 언젠가 멋지게 활용할지도 모르는 나를 위해 잠깐 보관하는 곳입니다.
저는 오늘도 도토리를 하나 더 묻었습니다.
겨울과 함께 제안서 시즌이 돌아오면 찾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마 못 찾을 겁니다.
그래도 폴더명은 잘 지어두었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