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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짧아진 게 아니라 잘게 썰린다

WORK/조직과 일

하루가 짧아진 게 아니라 잘게 썰린다

하루가 짧게 느껴지는 건 시간이 부족해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루가 자주 끊깁니다.

오늘 벌어진 일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출근하자마자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2분기 보고서를 끝내야겠다고 생각하고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고객사에서 전화가 옵니다. 전화를 받고 나면 다른 담당자에게 메시지가 와 있습니다. 메신저에 답을 하고 나면 팀원이 주간 보고서 확인을 요청하고, 확인하자마자 긴급 플래그가 붙은 메일을 정리해서 외주 업체에 전달합니다. 그리고 또 고객사에서 전화가 옵니다.
하나를 처리했다고 생각하면, 또 다른 연락이 연이어 옵니다. 그렇게 잘게 썰린 시간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하루 종일 일했습니다. 대충 넘기지도 않았습니다. 기다리는 답을 주고, 막힌 것을 풀고, 필요한 내용을 이어서 담당 팀원들이 헛힘 쓰지 않게 했습니다. 그런데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서야 그날 오간 연락들을 정리하고, 원래 하려고 했던 일을 떠올립니다.

아, 오늘 2분기 보고서 끝내야 하는데.

하루가 두 번 시작되는 셈입니다. 업무 시간은 지나갔는데, 오늘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일은 아직 시작도 못했습니다. 하루를 두 번 살다니 그거 참 행운이군, 하고 웃을 수도 있지만 그런 농담도 안 나올 만큼 지쳤습니다. 저녁이 돼서야 보고서를 열거나 기획안을 들여다보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의 잔해를 수습하는 기분이 듭니다.

주말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장마철이나 한겨울처럼 밖에 나가기 어려운 시기에는 집 안에서 하루가 잘게 나뉩니다. 뭔가 해보려고 앉으면 “아빠 이것 좀 봐” 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다녀와서 다시 앉으면 또 다른 부름이 생깁니다. 블록을 봐달라고 하고, 게임에서 막혔다고 부르고, 간식을 찾고, 갑자기 잘 있던 장난감이 망가졌다고 합니다.

하나하나 보면 크거나 대단한 일은 아닌데, 작은 부름들이 하루를 자릅니다. 몇 번 집안을 오가다 보면 오후가 되어 있고, 어디를 제대로 다녀온 것도 아니고, 쉰 것도 아니고, 뭔가를 끝낸 것도 아닌 날이 됩니다. 계속 움직였는데, 일요일 저녁이 되면 이번 주말도 허무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루를 자르는 것이 밖에서만 오는 것도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일이 있으면 먼저 그쪽으로 가게 됩니다. 보고서를 보내려다가 양식이 틀어진 것을 보면 전체 템플릿부터 고쳐서 팀원들에게 다시 배포해야 마음이 놓입니다. 일정표를 보다가 다가오는 일이 허술해 보이면 기획안을 다시 엽니다. 원래는 파일 하나를 메일로 보낼 생각이었는데, 정신을 차리면 템플릿의 여백을 고치고 있거나 아직 요청받지도 않은 세부 계획을 손보고 있습니다.

집에서도 비슷합니다. 빨래가 보이면 빨래를 돌리고, 설거지가 보이면 그걸 먼저 해야 마음이 편해집니다. 쓰레기봉투가 차 있으면 묶어야 하고, 식탁 위에 무언가가 올라와 있으면 치워야 합니다. 그냥 지나가면 될 것 같은데 잘 안 됩니다. 눈에 들어온 일은 제 안에서 순식간에 할 일 목록으로 올라가고, 이걸 끝내야 다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아내는 가끔 저에게 별 도움 안 되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합니다. 아내와 저는 사실 집안일에서 협업이 잘 안 됩니다. 제가 뭔가 도우려다가 오히려 일이 꼬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옷을 먼저 빨았는데 이불을 먼저 빨아야 햇빛에 널어놓을 수 있었다고 한소리 듣거나, 음식물 쓰레기 처리기를 돌렸는데 저녁 식사까지 마치고 모아서 돌리지 그랬냐고 타박을 받는 식입니다. 좋은 의도로 움직였는데 결과적으로는 도움보다 혼선에 가까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보이면 하게 됩니다. 회사에서도 그렇고 집에서도 그렇습니다. 보이는 것을 그냥 두는 능력이 부족합니다. 어떤 사람은 큰 흐름을 위해 작은 어긋남을 넘길 수 있지만, 저는 그 어긋남을 본 순간 이미 마음의 한쪽이 그쪽으로 가 있습니다. 솔직히 제가 소인배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보고서 내용보다 양식이 먼저 보이고, 쉬려고 앉았는데 설거지가 먼저 보이는 식입니다.

그러니 하루를 끊는 건 전화와 메신저만이 아닙니다. 고객사 연락이, 아이의 부름이, 제가 지나치지 못하는 작은 일들이 하루를 자릅니다.
예전에는 어땠는지 잠깐 떠올려 봅니다. 팀장이 아니었을 때도, 아이가 없었을 때도 바빴습니다. 마감은 늘 있었고, 일은 늘 많았습니다. 그래도 그때의 바쁨에는 덩어리가 있었습니다. 주어진 일이 있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한동안은 그 일을 붙잡고 있을 수 있었습니다. 회사에서는 맡은 일을 마감일까지 밀고 가면 됐고, 집에서는 집의 시간이 따로 있었습니다. 똑같이 바빴지만 바쁨이 한 방향으로 흐르는 시기였다고 할까요.

지금의 바쁨은 방향이 자주 바뀝니다. 기획을 하다가 연락을 받고, 연락을 정리하다가 보고서를 고치고, 보고서를 보내려다 템플릿을 손봅니다. 집에서는 쉬려고 앉았다가 빨래를 보고, 빨래를 돌리다가 아이의 부름을 듣고, 아이 방에 다녀오다 식탁 위에 놓인 컵을 봅니다. 하루가 앞으로 나아간다기보다 여기저기에서 잘려 나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일의 밀도도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한 가지 일을 더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지금은 훨씬 많은 일을 쓸어내듯 처리합니다. 하나하나가 그렇게 가벼운 일도 아닙니다. 일들이 많아지면 머릿속은 더 복잡해집니다. 끝낸 일은 많은데, 끝냈다는 느낌은 약합니다. 뭔가 많이 한 것 같은데, 이룬 게 없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바쁜 하루를 보내고 나서도 가끔 허탈합니다. 필요한 일을 했고, 누군가의 요청에 답했고, 눈에 보이는 것을 치웠는데, 저녁이 되면 하루가 흐릿합니다. 오늘 무엇을 했는지보다, 무엇에 계속 불려 다녔는지가 먼저 떠오릅니다. 뚜렷한 결과물을 매일 남기고 싶은 건 아닙니다. 다만 하루가 너무 잘게 나뉘고 나면, 그날이 제 안에 제대로 남지 않습니다.

남지 않는 하루가 쌓이면 시간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갑니다. 기억에 남는 날이 적으니, 돌아보면 몇 달이 통째로 비어 있는 것 같습니다. 젊을 때는 하루를 흘려보내도 그런 날이 삶을 이루는 많은 날 중 하나라고 여겼는데, 지금은 그 하루하루가 아깝습니다. 시간 자체보다,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흘려보낸 시간이 아깝습니다.

아내와의 대화도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여행을 가고, 밥을 먹고, 쓸모없는 이야기를 오래 했습니다. 지금은 대화의 대부분이 아이들 이야기입니다. 필요하고 중요한 이야기지만, 필요한 이야기만으로 하루가 채워지면 우리가 하루를 산 건지 그냥 운영한 건지 헷갈립니다.

누구나 역할 안에서 살아갑니다. 직장에서는 책임이 부르고, 집에서는 생활이 부릅니다. 고객사 연락을 무시할 수 없고, 아이의 부름을 못 들은 척할 수 없고, 눈에 보이는 일을 매번 지나칠 수도 없습니다. 그 부름에 답하는 것이 지금의 제 하루입니다. 그런 하루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가 감당해야 하는 역할이고 시간입니다.

여유를 바라는 게 아닙니다. 하루 중 어느 한 조각만이라도 끊기지 않았으면 하는 겁니다. 예전처럼 보고서 하나에 만족스럽게 시간을 쏟아보는 것. 아이와 블록을 끊기지 않고 끝까지 완성해보는 것. 잠들기 전에 아내와 아이들 얘기 말고 아무거나 쓸모없는 이야기를 길게 해보는 것. 그렇게 안 잘린 한 조각이 하루에 하나쯤 있으면, 그날은 흐릿하게 지나가지 않고 기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나이를 먹으니 하루가 짧아진 게 아니라 잘게 썰린다는 생각을 합니다. 

같은 24시간인데, 어떤 날은 하나의 모양으로 남고, 대부분의 날은 흩어진 조각으로 지나갑니다. 바쁜 날이 모두 아쉬운 것은 아닙니다. 힘들어도 하나의 일을 끝까지 붙잡은 날은 힘든 대로 남습니다. 아내와 오래 이야기한 날도 남고, 아이와 뭔가를 끝까지 만든 날도 남습니다. 

오늘도 바빴습니다. 연락에 답했고, 일을 처리했고, 눈에 보이는 것을 치웠고, 누군가의 부름에 대답했습니다. 그런 하루도 제 삶이고, 제가 맡은 역할이며, 제가 지나온 시간입니다.

그래도 하루 끝에 피로만 남는 날이면 아쉽습니다.

저는 그저, 오늘 하루가 덜 잘려서 기억에 남았으면 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