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ter

새 글을 메일로 받아보세요

한 달에 한 번, 그달의 글을 추려 보내드립니다.

메일로 구독하기
저전력 모드에 대처하는 자세

LIFE/일상의 기록

저전력 모드에 대처하는 자세

회사에 있을 때는 휴대폰 배터리를 거의 의식하지 않습니다.

책상 위에는 충전기가 있고, 자리에 앉으면 습관처럼 휴대폰을 꽂아둡니다. 

전화를 받거나 알림을 확인해도 불안하지 않습니다. 배터리는 줄어들기 전에 다시 채워집니다. 

저는 배터리 관리를 꽤 잘하는 사람입니다.


그 착각은 외근이 있는 날 깨집니다. 

고객사 미팅을 마치고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길에 휴대폰을 봅니다. 

17퍼센트. 숫자는 작고, 남은 여정은 깁니다. 

회사로 돌아가도 한 시간, 집으로 가도 한 시간 이상입니다. 

경험상 이 휴대폰의 충전율 16퍼센트는 30분 안에 전원이 꺼진다는 예고나 다름 없습니다.

 

오래된 아이폰의 배터리 충전율은 숫자가 아니라 협박입니다. 

지금 쓰는 아이폰은 산 지 5년이 지났습니다. 배터리 서비스를 받으라는 알림이 뜬 지도 오래됐습니다. 

이 정도면 보조배터리를 챙겨야 합니다. 물론 보조배터리도 꽤 괜찮은 걸로 사두었습니다. 외근 가방에는 없을 뿐입니다.
보조배터리는 보통 집에 있습니다. 책상 위에 있거나, 서랍 안에 놓여 있을 겁니다. 사실 어디에 있는지 잘 모릅니다. 

목적은 분명히 외근용이었는데, 실제로는 집 안에서 저의 준비성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준비성은 있는데 휴대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선 휴대폰을 저전력 모드로 바꾸고, 화면 밝기를 최저로 내립니다. 열려 있는 앱을 모두 닫고 지도 앱은 꼭 필요할 때만 보기로 합니다. 음악, 뉴스, 유튜브 모든 걸 포기합니다. 평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열던 앱들이 배터리 15퍼센트 앞에서 갑자기 사치품이 됩니다.

 

지하철에 서 있으면 같은 칸의 사람들은 대부분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을 보고 있습니다. 

저는 혼자 앞을 봅니다. 노선도를 보거나 창문에 비친 얼굴을 보기도 하고, 여기에 이런 게 있었나 싶은 광고판을 보기도 합니다. 

왠지 이 칸에서 저만 스마트폰의 노예가 아닌 것 같은 우쭐한 기분이 듭니다. 남들은 모두 화면에 붙잡혀 있는데, 저는 현실 세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물론 아닙니다. 저는 휴대폰을 안 보는 게 아니라 못 봅니다. 자주적인 인간이 된 것이 아니라 13퍼센트 남은 배터리의 노예입니다. 

한참 멍하니 서 있다 보면 별생각이 다 듭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의 나는 지하철에서 뭘 했나. 한 시간 넘게 출근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더 깊은 사람이었을까. 11퍼센트 남은 배터리를 확인하면서 스마트폰 때문에 나의 사고 능력이 망가졌다는 생각을 잠깐 해봅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도 저는 아무 생각 없이 창밖을 보거나, 졸거나 별 의미 없는 생각을 했습니다.

휴대폰이 제 사유를 망친 게 아니라, 제 사유의 깊이가 원래 그 정도였습니다.

 

그때 전화가 옵니다. 이 순간을 위해 아껴둔 휴대폰입니다. 화면을 켜는 것부터 마음이 아프지만, 회사입니다. 

받아보니 파일서버 접속이 잘 안 된다고 합니다. 저는 파일서버 관리자가 아니지만 이런 전화는 종종 제게 옵니다. 

일단 이렇게 해보고, 안 되면 저렇게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3층에 파일서버를 아는 친구에게 물어보라고 설명합니다.

 

4분 통화했는데 배터리 4퍼센트가 빠졌습니다.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았던 통화에 남은 시간의 3분의 1을 썼습니다. 이제 한 자릿수입니다. 화면을 켤 때마다 숫자가 줄어드는 게 보입니다. 지도 앱을 열어서 환승할 버스가 언제 오는지 봐야 하지만 참습니다. 고객사에서 전화가 올 수도 있으니 전원을 꺼둘 수도 없습니다. 이 상황에서 휴대폰은 배터리에게 잡힌 인질이나 다름없습니다.


지하철에서 내리면서 결국 휴대폰이 꺼졌습니다. 검은 화면을 보자마자 마음이 급해집니다. 

이제 버스 시간을 볼 수도, 택시를 부를 수도 없습니다. 고객사에서 전화가 와도 받을 수 없습니다. 

사회와의 연결이 끊어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막상 버스정류장에 가면 전광판이 있습니다. 버스가 언제 오는지 알려줍니다. 

생각해보면 지도 앱이 꼭 필요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꺼진 휴대폰을 들고 있으면 사소한 불편도 재난처럼 느껴집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큰일 난 사람처럼 다리를 떨고 있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충전기를 꽂습니다. 10분쯤 지나면 휴대폰이 다시 켜집니다. 

사과 로고가 뜨고, 알림들이 올라옵니다. 제 사회생활 네트워크가 다시 부팅되는 순간입니다. 

그 사이 급한 전화가 왔을까, 중요한 메시지가 쌓였을까 확인합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부재중 전화도 없고, 급한 메시지도 없습니다. 

세상은 제가 30분 동안 오프라인이었는지 몰랐던 것 같습니다. 

저는 사회와 끊어진 30분을 너무나 긴 시간으로 느꼈는데, 그 시간 동안 아무도 저를 찾지 않았습니다.
다행인데, 어딘가 허전합니다. 그리고 언제나와 같은 다짐을 합니다.

 

다음 외근에는 꼭 보조배터리를 챙기자.


보조배터리는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지만, 실제로 챙기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