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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듣지 않기 위해 이어폰을 낍니다

LIFE/일상의 기록

아무것도 듣지 않기 위해 이어폰을 낍니다

노이즈 캔슬링을 꽤 이른 시기에 접한 편입니다. 2008년 무렵, 매거진 에디터로 일할 때 소니에서 출시를 앞둔 헤드폰의 샘플을 보내왔습니다. 주변 소음을 특정 대역에서 최대 99퍼센트까지 줄인다는, 세계 최초의 디지털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이었습니다.

제품을 받아들고 참지 못했습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헤드폰을 쓰고 노이즈 캔슬링 버튼을 눌렀습니다.
귀가 갑자기 먹먹해졌습니다. 고장 난 건가 싶어 기능을 껐다가 다시 켰습니다. 자동차 소리와 거리의 웅성거림이 한 발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가까워졌습니다. 몇 번을 반복하고 나서야 이게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음악은 아직 틀지도 않았는데, 이미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세상이 조용해졌다기보다, 세상과 제 사이에 문이 하나 닫힌 느낌이었습니다. 자동차는 계속 지나가고 사람들도 옆에서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 소리들이 저에게 직접 닿지 않았습니다.

리뷰를 쓰고 나서도 그 느낌이 마음에 들어서 구입까지 했고, 지하철에서도, 비행기 안에서도 써봤습니다. 전동차의 소음이 얼마나 줄어드는지, 비행기 엔진 소리 속에서 음악이 얼마나 또렷하게 들리는지, 저만 느낄 수 있는 고립감을 만끽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의 저는 이걸 음악을 더 잘 듣게 해주는 신기한 음향 기술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노이즈 캔슬링은 애초부터 소음을 줄이기 위해 만들어진 기술이었습니다. 소니는 1992년 여객기 객실용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을 내놓았고, 1995년에는 주변 소음을 최대 70퍼센트까지 줄이는 상업용 제품을 선보였습니다. 제가 리뷰한 제품은 그 소음을 디지털로 분석해 최대 99퍼센트까지 줄인 첫 모델이었습니다. 음악은 그다음이었습니다. 저는 리뷰를 쓰면서 음악이 얼마나 선명하게 들리는지를 강조했지만, 노이즈 캔슬링 기술은 처음부터 세상의 소음을 거부하기 위한 기술이었던 셈입니다.

이제 노이즈 캔슬링은 특별한 기능이 아닙니다. 작은 무선 이어폰에도 들어가고, 지금 제가 쓰는 이어폰에도 당연히 그 기능이 있습니다.
달라진 건 제가 쓰는 방식입니다. 요즘은 음악을 틀지 않은 채 노이즈 캔슬링 기능만 켜둘 때가 많습니다. 이어폰을 끼고 음악 앱을 열었다가, 몇 곡을 넘긴 뒤 화면을 끕니다. 음악을 들으면 가사를 듣거나 리듬을 따라가게 됩니다. 침묵은 따라갈 것이 없습니다.

회사에서도 집중해야 할 때 이어폰을 낍니다. 팀원들의 대화 소리, 의자 끄는 소리, 프린터가 종이를 뱉어내는 소리가 멀어집니다.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에는 제원표에 없는 기능도 있습니다. 귀에 꽂고 있으면 사람들이 말을 덜 겁니다.
기능을 켜면 소음이 줄고, 이어폰을 끼기만 해도 대화 요청이 줄어듭니다. 제법 괜찮은 이중 차단입니다. 정말 급한 일이 생기면 팀원이 책상 앞으로 와서 손을 흔듭니다. 소리는 취소할 수 있어도 시야까지 취소할 수는 없습니다.

몇 년 전 SNL에서, 이어폰을 낀 채 일하는 신입 사원이 사수의 지적을 받자 이걸 끼고 있어야 안정감이 든다고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장면을 봤습니다. 저는 그 말에 격하게 공감했습니다. 20년 넘게 일한 사람이 Z세대 사원의 태도에 공감하는 게 조금 주책맞을지 몰라도, 이해는 됐습니다. 음악을 듣고 싶은 게 아니라, 들려오는 소음을 줄이고 싶은 겁니다.

하루 종일 말과 전화와 알림을 받고 나면 새로운 소리를 귀에 넣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지하철 안내 방송, 옆 사람의 통화, 자동차 경적, 카페의 음악까지 모두 각각의 이유로 들려오지만, 제 귀가 그 이유를 전부 존중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전에는 이어폰을 고를 때 얼마나 잘 들려주고, 잘 표현하는지를 봤는데 지금은 무엇을 얼마나 잘 지워주는지를 먼저 봅니다.

취향은 좋아하는 것을 찾아 생활 안에 더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책을 읽고, 마음에 드는 물건을 고르는 일이죠. 요즘은 덜어내는 쪽에 취향이 생겼습니다. 듣지 않을 소리, 보지 않을 화면, 받지 않을 알림을 고릅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좋아진 게 아니라, 들어오는 것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2008년의 저는 소음이 줄어든 공간에 어떤 음악을 채울지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그 공간을 굳이 채우지 않습니다.

요즘도 지하철에 타면 이어폰부터 끼고, 노이즈 캔슬링 기능만 켜둡니다. 전동차의 굉음이 멀어지고, 맞은편 사람들의 대화가 알아들을 수 없는 크기로 내려갑니다. 이어폰에서는 아무것도 재생되지 않습니다.
이어폰을 끼고 침묵을 듣습니다.

적어도 음질 때문에 불평하는 일은 없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