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하철에 빈 좌석이 있어도 잘 앉지 않습니다.
서서 가는 시간을 칼로리 소비량으로 계산하는 치밀한 다이어터가 아닙니다. 단지 앉으면 옆 사람과 팔이 닿기 때문입니다.
지하철 의자는 사람 한 명이 앉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제 기준으로는 그 사이에 공간이 한 사람분쯤 더 필요합니다. 서울메트로가 그런 규격까지 고려해줄 리는 없으니 제가 서는 쪽을 택합니다.
그렇게 20년 가까이 대중교통을 타며 많은 사람에게 좌석을 양보했습니다. 단언컨대, 배려심 때문이 아닙니다.
남과 닿지 않으려다 보니 결과가 선행처럼 보였을 뿐입니다.
물론 출퇴근 시간의 만원 전철에서는 이런 원칙이 아무 소용 없습니다. 평소에는 팔 하나 닿지 않으려고 서서 가지만, 그 안에서는 형체를 유지하는 일부터 걱정해야 합니다. 제 퍼스널 스페이스에 대한 주장이 아무런 협상 없이 기각되는 순간입니다.
모르는 사람과 몸이 닿으면 저도 모르게 움찔합니다. 더럽다는 생각은 아닙니다.
남과 닿으면 손을 씻거나 물건을 소독해야 안심하는 성격도 아닙니다. 그냥 순수하게 타인과 닿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습니다.
예를 들어서 허리가 뻐근해도 마사지를 받지 않습니다. 목욕탕에서 세신사에게 몸을 맡겨본 적도 없습니다.
허리가 아프면 그냥 아픈 채로 삽니다. 제 몸은 편해지지 않지만, 마음의 부담을 생각하면 그쪽이 낫습니다.
회사에서도 팀원과 거리를 두고 이야기하는 편입니다.
팀원의 모니터 화면을 보면서 문서를 직접 수정해야 할 때 옆에 붙어 서서 키보드에 손을 뻗지 않습니다.
“잠깐 제가 앉아도 될까요?”
팀원이 일어나고, 제가 앉고, 팀원이 한 걸음 물러서면 설명을 시작합니다.
문서 한 줄을 고치기 전에 공간의 사용권부터 먼저 확보하는 셈입니다.
제가 사람과 닿는 일 자체를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집에서는 사정이 반대입니다.
아이가 두 팔을 벌리고 달려오면 저도 팔을 벌립니다. 품으로 뛰어드는 아이를 안는 걸 좋아합니다.
아내와 손을 잡고 걷는 길도 좋아하고, 소파에 앉아 있으면 먼저 옆으로 붙습니다.
아내는 저를 밀어냅니다. 덥다거나 불편하다거나, 너무 질척대지 말라고 합니다. 회사에서는 제가 한 걸음 물러서는데 집에서는 아내가 한 걸음 물러섭니다. 아내가 슬쩍 몸을 빼면 서운합니다. 저는 좋아서 다가간 건데, 아내는 그 순간을 부담스럽게 여깁니다.
그 반응을 보고 있으면 회사에서의 제 모습이 떠오릅니다. 팀원이 화면을 함께 보려고 가까이 오면 저는 몸부터 뒤로 뺍니다. 설명을 들으러 다가왔을 뿐인데, 제 반응만 보면 접근을 거부당한 것처럼 느낄 수도 있습니다. 제가 아내에게 느끼는 서운함을, 다른 사람도 저에게 느낄 수 있다는 걸 이해합니다.
그렇다고 다음 날부터 지하철 좌석에 편하게 앉거나 팀원과 어깨를 맞대고 화면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격은 깨달음 하나로 업데이트되지 않습니다.
저는 계속 팀원과 거리를 두고, 지하철에 빈 좌석이 생겨도 좌우에 앉은 사람을 보고 그냥 서 있을 겁니다. 바뀔 가능성은 없습니다.
다만 몸을 피한 뒤에는 말을 더 친절하게 합니다. 거리를 두는 쪽에는 별 뜻이 없어도, 다가온 쪽에는 뜻이 생길 수 있으니까요.
제 퍼스널 스페이스는 넓은 게 아니라 기준이 까다로운 편입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사람이 내리면 가끔 빈 좌석이 생깁니다. 저는 잠깐 바라보다 옆으로 비켜섭니다. 곧 다른 사람이 와서 앉습니다.
그 사람은 좌석을 얻고, 저는 팔이 닿지 않을 만큼의 공간을 얻습니다.
집에 도착하면 아이가 달려옵니다.
그때는 두 팔을 벌립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