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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만 남았습니다

LIFE/일상의 기록

8권만 남았습니다

책장을 정리하다가 오래된 책 한 권을 발견했습니다.
책등은 바랬고, 뒷 표지에는 낯선 스티커가 붙어 있었습니다. 스티커에는 대여점 이름과 전화번호, 손으로 적은 관리 번호가 적혀 있습니다. 이건 변명의 여지 없이 도서 대여점에서 빌린 책입니다. 

순간 오래된 죄를 들킨 기분이었습니다.
일부러 훔친 것은 아니고, 제가 즐겨 읽는 장르의 책도 아닙니다. 어느 날 빌린 뒤 정신없이 지내다 반납일을 넘겼고, 돌려줘야 한다는 사실까지 잊었던 것 같습니다. 몇 번이나 이사하면서 읽지 않는 책을 버렸는데, 이 책은 어떻게 계속 저를 따라왔습니다. 훔칠 마음은 없었지만 돌려주지 않은 것은 사실이니, 죄목을 붙이자면 점유이탈물횡령 정도가 될 겁니다.

이 죄를 어떻게 갚아야 하나 고민하다 출판일을 확인했습니다.
20여 년 전이었습니다.
제가 혼자 살던 시절이었고, 당시 살던 동네의 대여점 책이 분명했습니다. 그 대여점이 지금까지 남아 있을 리 없습니다. 그래도 스티커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어봤습니다.
신호가 몇 번 갔고, 누군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분위기가 가게가 아니라 어느 가정집 같았습니다. 
도서 대여점은 이미 폐업했을 거라고 짐작하면서도 물었습니다.
“혹시 거기 도서 대여점 아닌가요?”
아니라는 대답을 듣고, 전화를 잘못 걸어 죄송하다고 한 뒤 끊었습니다.
통화는 몇 초 만에 끝났지만, 전화기를 내려놓고 나니 20년 전의 대여점이 떠올랐습니다.

사장님은 늘 와이셔츠에 넥타이 차림이었습니다. 책을 고르다 보면 새로 들어온 책이나 아직 돌아오지 않은 다음 권에 관해 한두 마디를 나눴습니다. 당시에는 시리즈의 다음 권이 대여 중이면 기다려야 했습니다. 4권까지 읽었는데 5권이 없으면 다른 사람이 반납할 때까지 이야기도 거기서 멈췄습니다. 다음 날 다시 들르거나, 사장님에게 언제 돌아오는지 물었습니다. 저는 그 대여점에서 책을 많이 빌렸습니다. 사장님과 친밀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데면데면한 사이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워낙 책을 많이 빌려서였는지, 반납일이 조금 늦어도 사장님은 종종 눈감아주셨습니다. 연체료를 다 받지 않았던 적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친절을 돌려주지 않은 책 한 권으로 갚았습니다.

미안한 마음이 뒤늦게 들었지만 사과할 곳이 없었습니다. 대여점은 사라졌고, 사장님이 지금 어디에 계신지도 모릅니다. 책을 돌려드리려 해도 받을 사람이 없고, 죄송하다고 말하려 해도 들을 사람이 없습니다. 갚으려고 마음먹은 순간에야 갚을 곳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런 장소가 도서 대여점 하나만은 아니었습니다.
도서 대여점이 사라졌고, 비디오 대여점도 사라졌습니다. 사회 초년생 시절, 2만 원 가까운 수입 음반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하나를 골라 사던 음반 가게도 없어졌습니다. 그 시절엔 CD를 플레이어에 넣는 순간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애플뮤직에서 오늘 나온 음반을 바로 듣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음 곡으로 넘깁니다. 훨씬 편해진 것은 분명합니다. 보고 싶은 영화가 대여 중일 일도 없고, 다음 권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듣고 싶은 음반을 구하지 못해 몇 주씩 찾아다닐 일도 없습니다.
저는 그 편함을 잘 쓰고 있고, 옛날이 더 좋았다고 말할 생각도 없습니다.
다만 그 편함이 지나간 곳에는, 제가 인사하지 못한 것들이 남았습니다.

대여점에서 마지막 책을 빌리던 날에도 다음 날 다시 올 생각이었습니다. 음반 가게에서 문을 열고 나오던 날에도 다음 월급을 받으면 또 들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가게가 문을 닫는 장면을 직접 본 적은 없습니다. 한동안 가지 않았고, 어느 날 다시 생각났을 때 이미 없어졌습니다. 대부분은 사라졌다는 사실조차 한참 뒤에야 깨달았습니다.

제가 반납하지 못한 책은 8권입니다. 전체가 몇 권으로 끝나는지도 모릅니다. 앞 권도 뒷 권도 없습니다. 이야기 가운데 한 토막만 20년째 제 책꽂이에 꽂혀 있습니다. 펼쳐봐도 등장인물이 누구인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앞뒤가 없으니 다시 읽을 수도 없습니다.

버리자니 남의 물건이고, 돌려주자니 주인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책은 아직 서재에 있습니다.
돌려주지 못한 8권과, 제때 하지 못한 인사가 같이 꽂혀 있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