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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정말 연락을 안 받기로 했습니다

LIFE/일상의 기록

이번에는 정말 연락을 안 받기로 했습니다

저는 휴가를 잘 못 씁니다.

가족 여행을 마지막으로 다녀온 게 아마 3년 전인 것 같습니다. 여행 자체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과 어디 가는 걸 귀찮아하는 것도 아닌데, 휴가 날짜를 잡으려고 하면 꼭 눈에 밟히는 일들이 생깁니다. 잠잠하던 프로젝트에서 갑자기 뭔가 터지고, 고객사 행사가 잡히고, 보름 뒤라고 생각했던 일정이 앞당겨집니다.

생각해보면 제가 하는 일이 아무 일 없이 흘러간 적이 별로 없습니다. 브랜드 커뮤니케이션과 고객 접점 운영이라는 게 원래 그런 일인가 싶기도 합니다. 오늘까지 잘 돌아가던 일이 내일 갑자기 틀어질 수 있고, 분명 합의했던 일정이 누군가의 사정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십수 년을 해왔으니 이제 익숙해질 만도 한데, 휴가를 앞두고 있으면 평소보다 그런 일들이 더 잘 보입니다.

그래서 휴가를 잡을 때 나름 큰마음을 먹습니다.
이번에는 진짜 신경 안 쓴다. 
내가 없어도 회사는 돌아간다. 
사고가 터지면 팀원들이 알아서 해결하게 두고 고객사에서 전화가 와도 받지 않는다. 
휴가라고 미리 공지까지 했는데 그 정도는 해도 된다.
그렇게 굳게 마음을 먹은 뒤 며칠 동안 야근을 합니다.
제가 없는 동안 사고가 나지 않게 미리 해둘 일을 찾다 보면 끝이 없습니다. 진행 중인 업무를 당겨서 정리하고 팀원들이 물어볼 만한 내용을 챙겨두다 보면, 평소라면 다음 주에 해도 될 일까지 이번 주 안에 끝내고 싶어집니다. 정말 불안할 때는 주말에도 회사에 나갑니다.

휴가 때 일을 하지 않기 위해 휴가 전에 체력을 다 써버리는 셈인데, 그때는 별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들을 끝내놓아야 마음 편히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행 짐을 쌀 때는 노트북을 가져갈지 고민합니다. 이번에는 일을 안 하기로 했으니 필요가 없습니다. 호텔까지 가서 노트북을 켤 생각도 없습니다.
그런데 혹시 모르잖아요.
결국 가방에 넣습니다. 충전기도 챙깁니다.

그리고 이쯤에서 몸이 안 좋아지기 시작합니다. 
며칠 동안 늦게까지 일한 탓인지 긴장이 풀려서인지 모르겠지만 휴가가 시작되면 몸살 기운이 올라오거나 감기에 걸립니다. 모처럼 가족과 여행을 왔는데 저는 시작부터 골골대고 있고, 아내는 이런 일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라 이제 포기했다며 혀를 찹니다.

아이들도 실망한 눈치입니다. 아빠하고 놀러 왔는데 아빠는 자꾸 누워 있고, 어디를 가도 힘들다고 하니 좋을 리 없습니다. 저도 미안해서 계획한 일정은 어떻게든 따라가려고 합니다. 몸 상태가 엉망이어도 나가서 같이 밥을 먹고, 돌아다니다 힘들면 잠깐 쉬면서 버팁니다.

그러다 전화가 옵니다.
휴가라고 미리 공지했고, 담당자에게도 말했고 메일에도 적어뒀으니 안 받아도 됩니다. 휴대폰 화면에 고객사 담당자 이름이 뜨는 것을 보고 그냥 둡니다.
몇 번 전화벨이 울리다 끊깁니다. 
별일은 아닌가 보다 안심하려는 순간 다시 전화가 옵니다.
몇 번 그러고 나면 결국 제가 집니다.

네, 책임님. 늦게 받아서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휴가 중이라서요. 미리 말씀을 드리긴 했는데요.

 

그렇게 말해놓고도 상대방 설명을 끝까지 듣습니다.

아, 일정에 문제가 생기셨다고요.

 

이때부터는 정말 골치 아파집니다.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정말 몰랐다고 할 수 있었는데, 이제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아버렸습니다.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도 대충 짐작이 갑니다.

회사에서 전화가 올 때도 있습니다.

이사님, 휴가 중이셔서 정말 연락 안 드리려고 했는데요.

 

여기까지 들으면 그다음에는 좋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오늘 고객사에서 갑자기 요청이 하나 들어왔는데 투입 비용이 너무 과도한 일이라서 저희가 판단하기 좀 어려워서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아침에 가족들이 준비하는 동안 호텔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엽니다. 잠깐 메일만 확인하려고 했는데 첨부파일을 열고, 파일을 봤으니 답을 해야 하고, 답을 하려니 다른 자료도 확인해야 합니다. 저녁에 숙소로 돌아와서 다시 열 때도 있습니다.
출발할 때 괜히 무겁게 이것까지 들고 가야 하나 고민했던 노트북이 결국 자기 용도를 찾아냅니다.

아내는 옆에서 말합니다.

이게 무슨 휴가야. 그런 회사 때려쳐.

 

저도 반박할 말이 없습니다. 전화를 받은 건 저입니다. 휴가 전 오랜 기간 야근하면서 제가 없는 며칠까지 어떻게든 통제해보려고 한 것도 저입니다.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노트북도 누가 가방에 몰래 넣어놓은 게 아닙니다.

다음 휴가에는 정말 다 내려놓겠다는 다짐은 이미 허망합니다. 사실 그 다짐은 이번 휴가 전에도 이미 했거든요.
그렇게 여행 내내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채로 돌아다니다 집에 옵니다. 마지막 날까지도 몸이 무겁고 기침을 하면서 아내에게 다음에는 진짜 이렇게 안 하겠다는 다짐도 합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알람이 울립니다.
이렇게 몸이 안좋아서 출근할 수 있을까 걱정하며 잠들었는데, 생각보다 꽤 괜찮습니다. 
며칠 동안 저를 따라다니던 몸살 기운도 거의 없어졌고, 씻고 옷을 입다 보니 컨디션도 돌아왔습니다.
그날은 별 무리 없이 출근했습니다.

참 희한하게도 휴가가 끝나니 다 나았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