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 가방을 찾는다는 착각
가방을 살 때마다 기대가 생깁니다.
이번 가방을 사면 뭔가 달라질 것 같습니다.
노트북은 안전하게 들어가고, 충전기와 마우스는 깔끔하게 정리되고, 서류는 구겨지지 않고, 어깨는 덜 아프고, 옷차림도 조금 더 정돈되어 보일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가방 하나를 샀을 뿐인데 삶이 정리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물론 현실은 대체로 그렇지 않습니다.
가방을 바꾼다고 충전기가 스스로 선을 감지는 않습니다. 영수증은 여전히 구겨진 채 어딘가에 들어가 있고, 립밤이나 볼펜 같은 작은 물건은 왜 꼭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물건을 찾으려고 가방 안을 뒤지는 제 모습은 정리된 직장인이라기보다 작은 동굴에서 발굴 작업을 하는 고고학자에 가깝습니다. 심각성도 아마 그에 못지않을 겁니다.
그래도 저는 근래 몇 년 동안 꽤 여러 번 가방을 샀습니다.
좋은 가방을 찾고 싶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좋은 가방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비싼 가방에는 비싼 기대가 들어간다
그동안 산 가방 중에는 나름 비싼 것도 있었습니다.
만다리나 덕 백팩이 있었고, 버버리 매장에서 충동구매한 백팩도 있었습니다.
그리 비싸지 않은 이스트팩 백팩도 있었고, 노트북 보호를 생각해서 인케이스 백팩을 산 적도 있습니다.
각각의 가방에는 나름의 기대가 있었습니다.
만다리나 덕 가방에는 직장인다운 정돈감이 있었습니다.
너무 튀지 않지만 적당히 세련되고, 노트북과 서류를 정돈해서 넣고 다니는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게 해줄 것 같았습니다.
버버리 백팩에는 조금 다른 기대가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저를 조금 더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게 해주는 가방이었습니다.
특별히 누가 봐주기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좋은 가방을 들고 있다는 작은 만족감이 있었습니다.
가방을 산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성공한 버전의 저를 산 것에 가까웠습니다.
이스트팩은 훨씬 편했습니다. 부담 없이 들 수 있고, 막 쓰기 좋고, 중학생 시절부터 익숙한 브랜드라 어딘가 마음이 편했습니다.
멋을 부리기보다 일상에 가까운 가방이었습니다.
인케이스 백팩은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노트북 보호. 디지털 장비를 안전하게 들고 다니려면 이런 가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노트북과 충전기, 마우스, 외장하드 같은 것들이 각자의 자리를 갖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 제가 가장 많이 들고 다니는 가방은 그중 어느 것도 아닙니다.
결국 제일 많이 드는 가방은 따로 있다
지금 제가 가장 자주 들고 다니는 건 씽크패드 노트북을 살 때 같이 받은 노트북 백팩입니다.
별도 구매 시 14,490원입니다.
가격으로 보면 가장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디자인도 아주 멋지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누가 봐도 패션 아이템이라기보다는, 노트북을 넣으라고 만들어진 백팩입니다. 아니 백팩이라기보다 노트북 이동용 장비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손이 갑니다.
노트북이 잘 들어갑니다. 충전기도 그냥 들어갑니다. 마우스도 들어갑니다. 서류도 적당히 들어갑니다. 예상치 못한 비가 와도 마음이 아프지 않습니다. 바닥에 잠깐 내려놓아도 가슴이 철렁하지 않습니다. 어깨에 메고 나갔다가 아무 생각 없이 다시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편합니다.
버버리 백팩은 저를 조금 더 그럴듯한 사람처럼 보이게 해줬지만, 씽크패드 백팩은 그냥 제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 받아들인 가방에 가깝습니다. 저는 멋진 가방을 든 사람이기 전에 매일 노트북과 충전기와 마우스와 이런저런 서류를 넣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가끔은 그 모든 것을 정리해서 넣기보다 일단 빨리 넣고 나가야 하는 사람입니다.
씽크패드 백팩은 그 현실을 받아줍니다.
가방은 취향보다 생활에 가깝습니다
가방을 고를 때 우리는 취향을 생각합니다.
색이 어떤지, 브랜드가 어떤지, 옷과 어울리는지, 너무 투박하지 않은지, 나이 들어 보이지 않는지, 너무 어려 보이지 않는지.
이런 것들을 생각합니다.
물론 중요합니다. 매일 들고 다니는 물건이니까 취향은 분명히 필요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자주 쓰는 가방은 취향만으로 정해지지 않습니다.
생활이 정합니다.
내가 매일 노트북을 들고 다니는지, 어깨가 쉽게 아픈지, 비 오는 날에도 신경 쓰지 않고 들어야 하는지, 대중교통을 타는지, 서류를 넣어야 하는지, 가끔 아이 물건까지 같이 넣어야 하는지, 퇴근길에 장을 보거나 택배를 들고 와야 하는지.
이런 조건들이 가방을 정합니다.
아무리 멋진 가방도 생활의 조건과 맞지 않으면 손이 덜 갑니다.
반대로 별다른 감흥이 없던 가방도 내 하루의 동선과 잘 맞으면 계속 쓰게 됩니다.
결국 도구는 나의 취향보다 나의 습관에 더 정직하게 반응합니다.
가방의 양면성
가방은 묘한 물건입니다.
겉으로는 나를 꾸며줍니다. 어떤 가방을 드느냐에 따라 사람이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백팩을 들면 실용적인 사람처럼 보이고, 브리프케이스를 들면 단정하고 세련된 직장인처럼 보이고, 고급 브랜드 가방을 들면 조금 더 신경 쓴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가방은 나를 폭로합니다.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하루를 사는지 대충 보입니다.
노트북, 충전기, 물티슈, 영수증, 오래된 사탕, 볼펜 두세 개, 왜 들어 있는지 모르는 케이블, 읽겠다고 넣어두고 끝내 다 읽지 못한 책.
가방 안에는 그 사람의 이상보다 실제 생활이 더 많이 들어 있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가방을 살 때는 정리된 저를 상상합니다. 필요한 물건이 각자의 자리에 들어가 있고, 미팅 때 필요한 자료를 바로 꺼내고, 노트북은 안전하게 보호되고, 충전기는 케이블 파우치에 가지런히 들어 있는 사람을 상상합니다.
하지만 현실의 저는 가끔 충전기를 찾느라 가방을 거의 뒤집습니다.
그 순간 깨닫습니다.
제가 필요한 것은 좋은 가방보다 조금 더 정리된 생활일지도 모른다는 것을요.
정리는 물건이 아니라 생활의 문제다
새 가방을 사면 인생이 정리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가방은 인생을 정리해주지 않습니다. 가방은 단지 제 생활을 담을 뿐입니다.
생활이 어지러우면 좋은 가방 안도 어지럽습니다. 생활이 정리되어 있으면 평범한 가방도 꽤 쓸 만해집니다.
물론 좋은 가방은 중요합니다.
어깨가 덜 아프고, 노트북이 안전하고, 물건을 꺼내기 쉽고, 비 오는 날에도 마음이 편하면 분명 좋은 도구입니다.
좋은 도구는 생활의 마찰을 줄여줍니다. 문제는 도구가 생활 자체를 대신 정리해주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건 가방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좋은 메모 앱을 쓰면 더 똑똑해질 것 같고, 좋은 노트북을 사면 더 생산적일 것 같고, 좋은 책상을 사면 더 집중할 것 같고, 좋은 운동화를 사면 운동을 더 많이 할 것 같습니다.
가끔은 맞습니다. 좋은 도구가 시작을 도와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도구는 저 대신 인생을 살아주지는 않습니다.
가장 좋은 가방은 나를 덜 괴롭히는 가방이다
요즘 제가 가장 많이 드는 씽크패드 백팩은 멋진 가방이 아닙니다.
당연히 비싼 가방도 아닙니다. 가장 세련된 가방도 아닙니다. 들고 나간다고 특별히 기분이 좋아지는 가방도 아닙니다.
그런데 자주 듭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저를 덜 괴롭히기 때문입니다.
노트북을 넣을 때 신경이 덜 쓰이고, 물건을 넣고 뺄 때 불편이 덜하고, 막 들고 다녀도 부담이 덜합니다. 제 생활에 잘 맞습니다.
어쩌면 좋은 도구란 그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저를 더 그럴듯하게 보이게 하는 물건이 아니라, 제가 실제로 사는 방식을 가장 덜 방해하는 물건.
그래서 여전히 새 가방을 보면 마음이 흔들리긴 합니다. 이번에는 정말 정리가 잘될 것 같고, 이번에는 정말 가볍게 다닐 수 있을 것 같고, 이번에는 정말 미팅에도 잘 어울리고, 주말의 가벼운 산책에도 어울릴 것 같습니다.
아마 또 혹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제 옆에는 씽크패드 백팩이 있습니다. 노트북과 충전기와 마우스와 정리되지 않은 몇 가지 물건을 품고 있습니다.
결국 인생을 정리해준 가방은 아니지만, 오늘 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가방입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실없는 생각이 오늘도 글 하나를 쓰게 만들었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