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원래 〈구독료는 커피값이라더니 월세를 받는 건에 대하여〉의 한 문단으로 들어갈 글이었습니다.
구독 경제에 대한 글을 쓰다가 문득 짜증이 치밀어 올랐습니다.
구독 경제 자체보다 너무 익숙한 카피 한 줄 때문입니다.
'커피 한 잔 값이면 이 모든 것을 즐길 수 있습니다'
어쩌면 무고한 문장일 수도 있습니다. 카피를 작성한 카피라이터도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제가 카피라이터 대신 더 오래 더 깊이 사유해보려 합니다.
지구온난화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이렇게 위험합니다. 때 이른 여름을 맞아 짜증이 치민 인간은 이렇게 무익한 일에 시간을 오래 씁니다.
커피 한 잔 값이면 이 모든 것을 즐길 수 있습니다
이 문장은 표면적으로 가격의 언어입니다. 그리고 이 문장의 핵심적인 기만은 가격에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값이 아니라 '모든 것'이며, 더 정확히는 '즐길 수 있다'는 표현입니다. 이 카피는 접근 가능성을 향유 가능성으로 바꿔 말합니다. 즐길 수 있음과 즐긴다는 것, 소유할 수 있음과 살아낸다는 것 사이에 놓인 결정적인 간극을 삭제합니다. 인간은 콘텐츠를 소비하는 기계가 아니며, 시간 속에만 존재하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아무리 많은 콘텐츠가 제공되어도 동시에 즐길 수 없습니다. 인간의 하루는 여전히 24시간이며, 한 달은 720시간에 불과합니다. (잠자고, 먹고, 이동하고, 회복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더 좁아집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경제적으로는 그럴듯하지만 존재론적으로는 거짓입니다. 인간에게 진정한 희소재는 돈이 아니라 시간이며, 더 근본적으로는 주의력입니다. 구독 서비스가 싸게 판매하는 것은 콘텐츠가 아니라 가능성의 환상입니다. 당신은 언제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배울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다는 잠재성을 팝니다. 그러나 잠재성은 현실성이 아닙니다. 가능성의 총량이 커질수록 삶의 총량이 커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 있습니다. 선택지가 과잉될수록 인간은 더 풍요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분열됩니다. 수많은 콘텐츠 앞에서 우리는 하나를 깊이 경험하기보다 다음 것을 의식합니다. 보고 있는 작품 안에 머무르지 못하고 아직 보지 못한 목록을 떠올립니다. 하나의 세계에 몰입하기보다 수천 개의 세계가 나를 부르고 있다는 압박 속에 삽니다. 풍요는 향유를 낳는 게 아니라 종종 결핍의 감각을 증폭시킵니다. 왜냐면 제공된 것의 규모가 커질수록 내가 실제로 누린 것은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서 구독경제의 문법은 인간의 유한성을 교묘하게 역이용합니다. 그것은 "당신은 사실 이 중 극히 일부만 경험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에게 남은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라고 정직한 의사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 모든 것을 즐길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모든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불가해한 총체입니다. 인간의 삶은 총체를 향유할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볼 수 없고, 모든 것을 읽을 수 없고, 모든 것을 배울 수 없고, 모든 가능성을 살아볼 수 없습니다. 산다는 것은 언제나 선택한다는 것이며, 선택한다는 것은 언제나 나머지를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시간을 살아가는 방식은 본질적으로 배제의 구조를 가집니다. 어떤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 시간에 다른 영화를 보지 않는다는 뜻이고, 어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시간에 다른 책을 읽지 않는다는 뜻이며, 어떤 삶을 산다는 것은 다른 가능한 삶을 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모든 가능성을 보유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가능성을 현실화하면서 나머지 가능성을 닫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다"는 카피는 이 실존적 사실을 은폐합니다. 그것은 인간을 선택하고 포기하는 존재가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을 손상 없이 보유할 수 있는 존재처럼 묘사합니다. 그러나 그런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장이 상상한 추상적 소비자일 뿐입니다. 실제로 인간은 피로하고, 산만하고, 늙어가며, 기억은 제한적이고, 감정은 쉽게 소진되고, 몰입에는 시간이 필요한 비루한 하드웨어를 보유한 존재입니다. 콘텐츠가 많아질수록 인간은 더 많은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유한성을 첨예하게 체감하게 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가격의 저렴함이 시간의 저렴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커피 한 잔 값은 금전적으로 사소할 수 있으나, 그 구독이 요구하는 시간은 결코 사소하지 않습니다. 한 달 구독료는 작지만, 그 구독이 전제하는 한 달은 작지 않습니다. 한 달은 인간의 삶에서 되돌릴 수 없는 실재적 단위입니다. 돈은 다시 벌 수 있지만 지나간 한 달은 다시 획득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카피는 교환의 단위를 의도적으로 혼동합니다. 소비자는 커피 한 잔 값을 지불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남은 생애 중 일부와 가능성을 특정 플랫폼의 공간에 귀속시킵니다. 구독은 단지 돈의 거래가 아니라 시간의 배치입니다. 무엇에 주의를 기울일 것인가, 무엇을 삶 안으로 들일 것인가, 어떤 경험을 나의 기억과 감각과 정체성의 일부로 만들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즉, 경제적 선택 이전의 존재론적 선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즐긴다'는 말 역시 지나치게 가볍습니다. 무언가를 진정으로 즐긴다는 것은 단순히 재생 버튼을 누르는 것이 아닙니다. 향유에는 체류가 필요하고, 이해가 필요하고, 감응이 필요하며, 기억 속에 침전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좋은 영화 한 편은 상영시간만큼만 소비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본 이후에도 생각 속에서 지속되고, 감정 속에서 변형되며, 때로는 삶의 해석 방식에 영향을 줍니다. 좋은 책 한 권도 페이지를 넘기는 시간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읽은 뒤의 사유, 반박, 수용, 망각, 재해석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플랫폼적 풍요는 이러한 체류 시간을 압박합니다. 콘텐츠는 더 빨리 선택되고, 더 빨리 재생되고(세르게이예이젠시테인맙소사! 2.5배속 재생이라니 이 무슨 천인공노할 악행이란 말입니까!), 더 빨리 중단되고, 더 빨리 다음 대상으로 대체됩니다. 무한한 목록 앞에서 개별 작품의 고유한 무게는 영혼의 무게만큼이나 가벼워집니다. 모든 것이 제공될수록,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충분히 머물지 못합니다. 이때 콘텐츠는 경험이 아니라 옵션이 되고, 향유는 몰입이 아니라 탐색이 되며, 문화는 사유의 장이 아니라 인터페이스의 흐름이 됩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넷플릭스 켜서 할 일 없이 리모컨 버튼만 매만지다 끄게 되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이렇습니다.
"커피 한 잔 값이면 이 모든 것을 즐길 수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진정으로 말하는 것은 '당신이 이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다'가 아니라, 더 정확히는 '당신은 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다'입니다. 이 카피는 현실의 향유가 아니라 잠재적 소유감의 쾌락을 판매합니다. 소비자는 실제로 콘텐츠를 모두 경험하지 못합니다. 다만 언제든 경험할 수 있다는 느낌을 삽니다. 이것은 소유가 아니라 대기 상태이며, 향유가 아니라 유예된 가능성의 축적입니다. 구독 목록은 확장되고 삶의 집중도는 낮아집니다. 보고 싶은 것, 읽어야 할 것, 들어야 할 것, 배워야 할 것들이 계속 쌓이지만, 그것들은 삶을 충만하게 하기보다 부채처럼 남습니다. 콘텐츠는 여가가 아니라 미처 마치지 못한 숙제의 형태를 띠기 시작합니다. 풍요가 압박으로 전환되는 순간입니다.
이 문장의 가장 깊은 문제는 인간의 유한성을 모욕한 데 있습니다. 인간에게 한 달은 단순한 과금 주기가 아닙니다. 늙음의 단위이며, 회복 불가능한 생의 조각입니다. 달력 위의 빈칸이 아니라, 살아야만 사라지는 존재의 일부입니다. 이 시간을 커피 한 잔 값이라는 사소한 비유에 집어넣는 순간, 광고는 삶의 비가역성을 가격의 경쾌함으로 덮어버립니다.
물론 누군가는 반론할 수 있습니다. 이 카피는 문자 그대로 모든 콘텐츠를 다 보라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많은 선택지를 저렴하게 제공한다는 뜻이라고. 이 반론은 부분적으로 타당합니다. 광고 문구는 언제나 압축과 과장을 동반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에서 비판은 더 날카로워져야 합니다. 문제는 소비자가 실제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다고 믿느냐가 아닙니다. 시장이 반복적으로 인간을 무한한 소비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호명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 카피의 허위성은 논리적 문자성에 있지 않고, 인간 이해의 방식에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시간적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인간을 선택의 고통을 겪는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인간을 집중과 망각, 피로와 회복, 몰입과 상실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대신 인간을 무한한 카탈로그 앞에서 끝없이 클릭할 수 있는 추상적 소비 단위로 봅니다. 존재는 사라지고 계정만 남습니다. 삶은 사라지고 이용권만 남습니다. 경험은 사라지고 요금제만 남습니다.
그러므로 이 카피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비판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습니다. 커피 한 잔 값으로 살 수 있는 것은 모든 콘텐츠가 아닙니다. 살 수 있는 것은 단지 그 콘텐츠 목록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입니다. 그러나 접근권은 향유가 아니며, 가능성은 경험이 아니고, 목록은 삶이 아닙니다. 인간의 시간은 유한하고, 주의력은 더욱 유한하며, 존재는 오직 선택된 일부의 경험을 통해서만 구성됩니다. 수천만 개의 콘텐츠가 제공되더라도 한 인간이 살아낼 수 있는 것은 창백할 정도로 작은 파편일 뿐입니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을 즐길 수 있습니다"라는 말은 풍요의 약속이 아니라 유한성의 은폐입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무한한 세계가 열린다고 말하지만, 정작 인간이 그 세계를 살아낼 시간은 주지 않습니다. 가격은 낮아졌지만 존재의 비용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커피 한 잔 값으로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즐길 수 없다는 사실을 커피 한 잔 값으로 잠시 잊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망각이야말로 제가 생각하는 현대 소비문화의 가장 정교한 상품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