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획대로 되지 않은 22년의 커리어에 대하여
거창한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사실 계획 같은 건 없었습니다. 아니, 있었는데 없어졌습니다.
계획대로 인생이 풀렸다면 지금쯤 저는 제품 디자인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대학원 진학을 위한 학비를 벌기 위해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첫 직장 입사 첫날부터 저의 인생 계획은 쓰레기통에 둥지를 틀어야 했습니다.
디자이너로 입사한 당일. 회사는 저에게 디자인이 아닌 글을 써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직후엔 UT를 하게 되었으니 제 커리어는 오타니도 헛스윙할만한 스위퍼처럼 크게 휘어졌습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할 궤적을 그렸다는 말이죠.
회사에 빈자리가 생기면 거기에 앉았고 급한 프로젝트가 생기면 일단 뛰어들었고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UX도 하고, 콘텐츠도 하고, 디자인도 하고, 기획도 하고, 웹사이트도 만들고, 제안서도 쓰고, 클라이언트와 커뮤니케이션하는 일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분위기 수습과 사고 수습은 덤이었습니다. 저의 부족한 사회성이 진정성으로 오해받았는지 의외로 잘 통한 건 다행입니다.
한동안은 스스로를 잡부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전문성에 대한 갈증과 열등감이 동시에 있었습니다. 한 해, 한 해 지날 때마다 원래 목표였던 대학원은 돌아갈 수 없는 곳에서 굳이 갈 필요가 없는 곳이 되어갔습니다.
그때 제 이력서는 설명하기가 좀 곤란한 물건이었습니다. 콘텐츠 에디터, 웹디자이너, UX 기획자, PR AE, 브랜드 커뮤니케이터. 거쳐온 직무는 여러 개인데, 정작 저는 이런 일을 합니다 라고 한마디로 말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면접장에서 가장 두려운 질문이 이전 직장에서 어떤 직무를 해왔습니까? 였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저에게 이력서가 너무 지저분하다. 이렇게 일하면 멀리 가기 어렵다고 조언해주신 대표님도 계셨습니다. 채용도 해주셨으면 더 감사했을 텐데 말이죠.
그런데 시간이 꽤 지나고 보니 어느 순간 제 이력서가 생각보다 쓸 만해졌습니다.
이것저것 거쳐온 경험이 서로 연결되기 시작했습니다.
콘텐츠를 작성해봐서 문장 하나가 사람의 이해를 얼마나 바꾸는지 알게 됐습니다. 디자인을 해봐서 보기 좋은 것과 쓰기 좋은 것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UX를 고민해봐서 기능보다 판단 구조가 먼저라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프로젝트를 여러 개 굴려보니 좋은 결과물이 재능만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방향, 역할, 설득, 조율, 인내.
그중에서도 버티는 힘이 생각보다 꽤 중요합니다. 저는 후배들에게 기획자로서 중요한 덕목은 재능이나 아이디어만이 아니라 인내라고 말하곤 합니다. 좋은 생각도 좋은 사람도 끝까지 가져가지 못하면 결과물이 되지 못하니까요.
이것저것 해봤다는것 만으로 커리어가 단단해지는 건 아닙니다.
흩어진 경험을 그냥 방치하면 잡무의 기억으로 남습니다. 하지만 그 경험을 다시 해석하고, 기준을 확인하고, 다음 일에 적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관점이 됩니다. 관점은 생각보다 강한 무기가 됩니다.
이 쯤에서 한 가지 고백할 게 있습니다.
저는 용기가 없는 사람입니다.
오랫동안 직장 생활을 하며 여러 일을 해왔고, 지금은 여러 사람과 기업 사이에서 역할과 방향을 조율하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막상 제 이름을 걸고 무언가를 시작하는 일은 계속 망설였습니다. 블로그 하나 만드는 것도 몇 년을 미뤘습니다.
틀리면 어떡하지. 아는 사람이 보면 어떡하지. 잘난 척으로 보이면 어떡하지. 그렇게 망설이기만 하다 어느새 마흔 후반이 되었습니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고, 팀을 챙겨야 하고, 회사 일은 밀려 있고, 몸은 피곤하고, 용기를 낼 타이밍에는 늘 그럴듯한 핑계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도 비슷한 분이 계실 것 같습니다. 하고 싶은 건 있는데 당장은 아닌 것 같고, 준비가 되면 시작하려고 했는데 정작 그 준비가 언제 되는지는 모르겠고.
그 마음을 잘 압니다. 저도 지금 그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으니까요.
계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얼마 전 다른 팀 후배가 진행 중인 사이드 프로젝트를 우연히 보았습니다. 방향이 좋아서 그냥 지나치기 어려웠습니다. 비슷한 일을 하며 겪었던 실패 요인과 실무자 입장에서 보완되면 좋을 부분을 정리해 장문의 피드백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보내고 나서는 바로 후회했습니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 길게 보냈나. 전문가도 아닌데 괜히 아는 척한 건 아닐까. 꼰대의 참견처럼 보이면 어쩌지.
다행히 돌아온 답은 긍정적이었습니다. 받아본 피드백 중 가장 구체적이었고 프로젝트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때 든 생각이 있었습니다.
내가 빛나는 것 보다 좋은 사람이 더 잘 보이는 자리로 올라갈 수 있게 밀어주는 일이 더 보람 있고 즐겁구나.
저는 성공담을 쓸 만큼 대단한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꽤 오래 헤매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블로그는 성공담을 쓰는 곳이 아닙니다.
22년을 일하고도 여전히 일을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래도 조금씩 알게 된 것들을 써두는 곳입니다.
제가 잘해서가 아니라 제가 꽤 오래 헤맸기 때문에 쓸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다고 믿어보려 합니다.
그래서 읽은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덜 헤맸으면 합니다.
무엇보다 저 처럼 용기 없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쉽게 깎아내리지 않기 위해 필요한 생각들을 이곳에 적어보려 합니다.
용기 없는 사람이 용기를 냈습니다.
일단 이 블로그를 시작하는 것까지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