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만 되는 게 더 지친다
먼저 한 가지 말씀드리면, 연애나 결혼생활, 인간관계에 대한 글은 아닙니다.
애플뮤직 보관함이 몇 달째 동기화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뭘 잘못 설정한 줄 알았습니다.
분명 쉬운 문제일 텐데 내가 체크박스 하나를 못 찾고 있는 건 아닐까. 요즘 사람들은 다 알아서 쓰는데 내가 나이 들어서 그런 건 아닐까.
그런 자격지심에 한동안은 문제를 애플보다 제 쪽에서 찾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상했습니다.
회사 맥북과 집 맥미니의 보관함은 서로 싱크가 맞습니다.
아이폰과 아이패드도 잘 맞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맥끼리, 모바일끼리만 맞고, 정작 맥과 모바일은 사맛디 아니합니다.
그것도 한쪽 방향으로만요. 맥북에서 넣은 곡은 아이폰에 보이는데, 아이폰에서 넣은 곡은 맥북에 안 보입니다.
이게 사람을 미치게 합니다. 아예 안 되면 차라리 받아들이겠는데, 반만 됩니다.
맥북은 알고 있는데, 보관함은 모르는 척한다
동기화를 껐다 켜고, 보관함을 통째로 비웠다가 다시 불러오는 것까지 해봤지만 그대로였습니다.
그래서 더 구체적으로 확인해봤습니다.
아이폰에서 넣은 곡을 맥북에서 검색하면, 보관함에 없는 곡이라면 추가 버튼이 떠야 합니다.
그런데 추가 버튼은 없고, 대신 옵션 메뉴에 '보관함에서 제거'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맥북도 안다는 뜻입니다. 이 곡이 제 보관함에 있다는 걸요.
그런데 보관함 목록으로 돌아가 제목으로 검색하면 나오지 않습니다.
다운로드한 음악만 따로 봐도 없습니다.
맥북은 그 곡이 보관함에 있다며 제거 메뉴까지 보여주는데, 정작 보관함 안에서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상태입니다.
슈뢰딩거가 봤다면 고양이 대신 애플뮤직이 양자 중첩 상태에 있다고 했을 겁니다.
생사의 문제는 아니니 윤리적 비난도 덜하고요.
플레이리스트는 오고, 노래는 사라진다
제가 아이폰에서 추가한 곡이 너무 마이너한 게 원인일까 싶어, 아이폰에서 새 플레이리스트도 만들어봤습니다.
플레이리스트라는 껍데기는 맥북에 바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담긴 노래는 비어 있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마이클 잭슨의 Billie Jean으로 테스트해봤습니다.
이 곡이 마이너하다면 세상 음악 99.9%는 언더그라운드로 분류해야 할 겁니다.
결과는 같았습니다. 이쯤 되면 제가 놓친 쉬운 설정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같은 계정, 같은 구독, 동기화도 켜져 있습니다.
맥끼리 되고 모바일끼리 되고 플레이리스트도 넘어오는데, 곡 항목만 맥의 보관함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애플뮤직은 플레이리스트가 있다는 사실은 기억하면서, 그 안에 담긴 노래는 잊어버립니다.
닫힌 구조는 안 될 때 더 닫혀 보인다
애플 제품은 잘 될 때는 편합니다.
설정이 단순하고, 기기들이 알아서 이어지고, 사용자는 복잡한 구조를 몰라도 됩니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 열어보지 않아도 되는 매끈함.
그게 애플이 오랜 시간 팔아온 '사용자 경험'입니다.
그런데 잘 안 될 때는 그 장점이 그대로 단점이 됩니다.
어디가 문제인지 볼 수 없고, 손댈 수 있는 곳도 많지 않습니다.
버튼은 몇 개 없고 설명도 없는데 결과는 계속 어긋납니다.
잘 될 때 마법처럼 보이던 닫힌 구조가, 안 될 때는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는 닫힌 상자가 됩니다.
불편해도 떠나지 못하는 이유
어떤 사람들은 제품의 디자인이나 브랜드 이미지를 자기 정체성의 일부처럼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 같은 애플 소유자들이 조금 유난스러운 부분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만큼 잘 디자인되고 좋은 제품이라는 뜻이겠죠.
저도 애플 제품을 오래 썼지만 이제는 그런 자랑스러운 감정보다는, 생태계에 묶여 있다는 느낌이 더 큽니다.
바꾸는 게 불가능하진 않지만 너무 귀찮습니다.
구매 내역, 사진, 메모, 일정, 가족 공유, 익숙한 인터페이스까지 한 번에 옮겨야 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아직도 애플을 씁니다. 신뢰해서 쓰는 것은 아닙니다.
예전에는 애플이라면 이런 기본적인 경험은 알아서 잘 해주겠지 믿었습니다.
지금은 반대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안 고쳐지는 문제가 생길 수 있고, 생각보다 자주 생기며, 일단 생기면 사용자가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고요.
하나의 앱이 불편한 것과는 다릅니다. 생태계의 약속이 어긋나는 느낌입니다.
내가 이 닫힌 구조 안에 들어와 있는데, 정작 문제가 생기면 그 구조가 나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물론 애플뮤직의 대체제는 있습니다. 스포티파이도, 유튜브뮤직도 좋은 서비스입니다.
하지만 제게 필요한 좋은 대체제란 단순히 더 나은 음악 앱이 아니라, 지금의 생활 전체를 덜 불편하게 옮겨갈 수 있는 구조여야 합니다. 사진, 메모, 일정, 이어폰, 노트북, 가족 공유, 익숙한 조작까지 포함해서요. 그렇게 생각하면 떠나는 일은 생각보다 큰 일이 됩니다.
불만은 쌓이지만 전환은 미뤄집니다. 신뢰가 줄어도 생활을 바꾸는 비용이 더 크면, 소비자는 계속 씁니다.
믿고 쓰는 것과 참고 쓰는 것은 다르다
요즘 제가 애플을 쓰는 느낌은 이쪽에 더 가깝습니다.
좋아서 쓴다기보다, 떠나는 비용이 아직 더 커서 씁니다.
이 결론이 좀 씁쓸합니다.
예전에는 애플을 쓰는 게 선택처럼 느껴졌는데, 지금은 거의 관성처럼 느껴집니다.
믿고 쓰는 것과 참고 쓰는 것은 다릅니다.
애플뮤직 보관함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갑자기 고쳐질 수도, 설정 하나를 다시 건드리면 풀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지금은 그냥 안 고쳐지는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중입니다.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 안 고쳐지는 상태까지 끌어안고 마음을 내려놓는 것.
흔한 애플 유저의 체념처럼 보일 수 있지만, 굳이 좋게 말하면 번뇌의 층위를 하나씩 벗겨내는 수행에 가깝습니다.
완전히 싫어서 떠나는 것도 아니고, 예전처럼 좋아서 머무는 것도 아닙니다.
불편한데 아직 떠나지 않는 상태. 신뢰는 줄었지만 관성은 남은 상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애플은 아마 모르는 게 아닐 겁니다.
'우리가 불편해도 쉽게 떠나지 못한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