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ter

새 글을 메일로 받아보세요

한 달에 한 번, 그달의 글을 추려 보내드립니다.

메일로 구독하기
입력창은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 - 네이버 AI 쇼핑, 그리고 객관식에 갇힌 나

TREND/기기와 경험

입력창은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 - 네이버 AI 쇼핑, 그리고 객관식에 갇힌 나

네이버 쇼핑에 AI가 들어온 지 석 달 됐습니다.

오늘 업무 시간에 한 팀원과 대화하던 중, 네이버 플러스 앱의 쇼핑 AI가 업데이트됐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스치듯 본 적은 있었지만 제대로 써보지는 않은 기능이었습니다. 마침 서큘레이터를 하나 찾고 있던 참이라, 한번 써보기로 했습니다.

쇼핑은 귀찮은 일입니다. 가격을 비교하고, 리뷰를 읽고, 배송비와 쿠폰을 따지고, 비슷한 제품 사이에서 내가 뭘 더 중요하게 보는지 계속 확인해야 합니다. AI가 이 과정을 줄여준다면 꽤 편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점찍어둔 제품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궁금했습니다. 
네이버 AI 쇼핑이 제가 봐둔 제품까지 도달할까. 아니면 제가 찾은 것보다 더 나은 대안을 보여줄까.


서큘레이터를 찾았는데 선풍기가 나왔다

처음엔 그럴듯했습니다.
앱은 첫 화면에서 제가 점찍어둔 제품을 바로 보여줬습니다. 
제 검색 흔적을 어느 정도 아는 듯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왜 그 제품을 봤는지도 어느 정도 짐작하지 않을까. 기대가 조금 생겼습니다.

제품 추천 아래에는 선택형 질문들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중 ‘에어컨과 같이 쓰기 좋은 제품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눌렀습니다. 질문을 이해하고, 연관 검색을 하고, 관련 문서를 보는 과정이 표시됐습니다. 실제로 60건의 문서를 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과정은 꽤 투명해 보였습니다. 다만 그 60건의 문서 목록은 대부분 네이버 블로그, 네이버 카페, 네이버 로고가 붙은 참고 문서였습니다. 적어도 제가 본 화면에서는, 넓은 웹을 뒤지는 AI라기보다, 네이버 생태계 안에서 근거를 모으는 AI처럼 보였습니다.

AI는 저소음, 바람 도달거리, 제어 편의성, 에너지 효율을 기준으로 제품을 추천했습니다. 
틀린 기준은 아니었습니다. 서큘레이터를 고를 때 중요한 조건들입니다. 그런데 제가 봐둔 제품은 그 안에 없었습니다.

AI는 제가 무엇을 봤는지는 아는 것 같았지만, 제가 왜 그것을 봤는지는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스펙만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거실에 놓았을 때 너무 튀지 않는지, 다른 물건들과 충돌하지 않는지도 보고 있었습니다. 
저소음과 바람 거리도 중요하지만, 그 물건이 거실 한쪽에 계속 놓여 있을 때 시각적으로 얼마나 거슬리는지도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추천의 기준 안에는 그 취향이 없었습니다.
질문을 바꿔도 비슷했습니다. ‘거실에서 쓰기 좋은 서큘레이터’를 눌러도 답은 같은 기준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제품 리스트가 나왔지만, 사고방식은 비슷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특정 브랜드를 찍은 질문이 나왔습니다.
‘모브랜드 서큘레이터 제품의 최저가를 찾아주세요.’ 이 정도면 꽤 단순한 요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브랜드도 있고, 카테고리도 있고, 원하는 행동도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추천된 것은 해당 브랜드의 가장 저렴한 휴대용 무선 선풍기였습니다.
저기... 선생님. 저는 서큘레이터를 찾고 있었는데요.

다시 해당 브랜드 서큘레이터 추천 모델을 찾아달라는 질문을 눌렀습니다. 
이번에는 휴대용이나 탁상용 선풍기 세 개가 추천됐습니다. 질문지는 분명 서큘레이터라고 말하고 있었는데, 답변은 선풍기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선풍기도 바람을 멀리 보낼 수 있으니 서큘레이터라고 부를 수는 있습니다. 그렇게 치면 주판도 계산기고, 부채질도 공조 시스템입니다.

여기서 조금 맥이 빠졌습니다.


쉬운 걸로 다시 해보고 확신했다

혹시 서큘레이터라는 애매한 카테고리 때문인가 싶어, 더 쉬운 걸 시켜봤습니다.
제가 자주 쓰지만 이름이 가물가물한 세안제가 있었습니다. 
훼이셜 클렌저인지 폼 클렌저인지 헷갈려서 일단 ‘브랜드명 + 훼이셜 클렌저’를 검색했습니다. 
그러자 엉뚱한 제품 셋을 추천하고, 다음 질문지로 ‘성분을 알려주세요’, ‘사용법을 알려주세요’, ‘인기 상품을 보여주세요’를 내밀었습니다.

뭘 눌러야 할지 몰라 인기 상품을 눌렀고, 그제야 제가 쓰던 폼 클렌저가 나왔습니다.
웃긴 건, 같은 키워드를 그냥 쇼핑 검색창에 치면 제가 찾던 제품이 바로 나온다는 겁니다. AI를 거쳤더니 오히려 더 멀리 돌아온 셈입니다.

이쯤 되니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건 서큘레이터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구나. 
제시된 질문을 누를 때마다 조건은 바뀌어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깊어지지는 않는구나. 
대화라기보다, AI가 미리 짜둔 객관식 시험에 가깝구나.

그렇게 저는 글을 썼습니다. 네이버 AI 쇼핑은 아직 대화가 아니라 객관식이더라. 내 맥락을 모른 채 선택지만 내밀더라. 
그래도 나쁘진 않았다. 객관식 질문지를 제공한 의도도 알 것 같다.
너그러운 평가와 함께 꽤 그럴듯하게 마무리했습니다.


그러다 한 줄에서 멈췄다

블로그에 글을 다 쓰고 등록만 하면 됐습니다.
그런데 문득 궁금했습니다. 언론은 이 기능을 어떻게 봤을까. 나처럼 애정 어린 타박이었을까, 아니면 영 못 쓰겠다는 혹평이었을까. 네이버 쇼핑 AI 업데이트 기사 몇 개를 뒤지다가, 한 줄에서 벼락 맞은 듯 멈췄습니다. 실제로 그만큼의 충격이었습니다. 
'세부 기능이나 복잡한 가격 조건을 담은 대화를 제안하는 기능도 추가됐다.'

대화? 무슨 대화. 저는 버튼만 누르고 있었는데요?
다시 앱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화면 맨 아래, 줄곧 거기 있었던 입력창을 그제야 봤습니다.

찾으시는 상품에 대해 물어보세요.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습니다. 숨어 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파란 테두리에 화살표 버튼까지 달린, 누가 봐도 여기에 입력하세요라고 말하는 칸이었습니다. 객관식 질문지만 누르며 헤맸는데, 자유롭게 물어볼 길이 처음부터, 그것도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주관식으로는 됐다

입력창에 직접 쳐봤습니다.
‘거실에 어울리는 예쁜 서큘레이터를 찾아줘.’
처음엔 또 못 찾더군요. 그래서 ‘더 예쁜 걸로 찾아줘’라고 했더니, 이번엔 찾았습니다.
세안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거 말고 다른 거’라고 치니, 제가 쓰던 그 제품이 나왔습니다.
객관식에선 안 되던 게, 주관식에선 됐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기존의 네이버 검색창에서 제품을 검색하는 경험보다 편하진 않았습니다.
기존의 검색 경험은 직관적인 데다, 대부분의 소비자가 20년 넘게 학습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유리하니까요.
하지만, AI 쇼핑은 제가 단정했던 것처럼 반쪽짜리 기능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AI만이 아니라, 그 길을 못 본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등록 직전까지 갔던 제 글은, 절반쯤 제 착각 위에 쓰여 있었던 셈입니다.

더 놀란 건 따로 있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헤매던 객관식 질문지가, 바로 이번 업데이트에서 새로 추가된 기능이었다는 겁니다. 
초기 버전에는 오히려 주관식 입력창만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저는 뉴스를 거꾸로 읽은 셈입니다. 
기사가 말한 '대화 제안 기능'이란 제가 줄곧 누르던 그 객관식이었고, 정작 진짜 대화가 가능한 입력창은 처음부터 거기 있었습니다.
새로 생긴 길에 정신이 팔려, 원래 있던 길을 못 본 겁니다.


선택지가 시야를 가둔다

곱씹을수록 어이가 없었습니다.
숨겨지지도, 접혀 있지도 않은 입력창을, 저는 두 시간 넘게 테스트하면서 못 봤습니다. 왜일까.

화면 한가운데에는 큼직한 선택지 버튼이 있었습니다.
'이 라인을 더 추천해줘', '약산성 폼클렌징을 보여줘', '후기를 요약해줘'. 
선택지는 화면의 주인공처럼 자리를 잡고 '여기서 고르세요'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제 머리는 그걸 오늘의 과제로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인지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전경-배경 지각과 선택적 주의로 설명합니다.
사람은 시야의 모든 요소를 같은 무게로 보지 않습니다.
어떤 요소가 전경이 되는 순간, 나머지는 눈앞에 있어도 배경으로 밀려납니다.
제 눈은 입력창을 봤을지 모르지만, 뇌는 그것을 과제로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객관식 버튼이 전경이 되는 순간, 주관식 입력창은 배경이 됐습니다.

부끄럽지만 적어둡니다. 저는 십 년 넘게 화면을 만들고, 사용자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놓치는지 분석해온 사람입니다. 
그런 제가, 가장 표준적인 자리에 놓인 입력창을 못 봤습니다. 전문가라고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여기서 고르는 거구나 하고 빨리 판단해버린 만큼, 더 빨리 갇혔는지도 모릅니다.

선택지는 편합니다. 동시에 시야를 가둡니다.
누군가 보기를 깔아주면, 우리는 그 보기 안에서만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출제자가 정한 선택지 밖에도 답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시험지를 받아 든 학생은 좀처럼 떠올리지 못합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누구의 실수라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객관식을 더한 건 나름의 배려였을 겁니다. 무엇을 사야 할지 막막한 사람에게는 빈칸보다 보기가 친절하니까요.
설계자는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주관식 입력창은 원래 있던 거니까, 그 위에 보기를 얹어도 헷갈릴 사람은 없겠지.'
틀린 판단이 아닙니다. 길을 하나 더 놓아준 것뿐이니까요. 그런데 그 늘어난 길이, 원래 있던 길을 가렸습니다. 

아무도 틀리지 않았는데, 이 UI를 처음 접한 사용자는 갇혔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섬뜩합니다.

결국 제가 마주한 건 AI의 한계만은 아니었습니다. 선택지 앞에서 시야가 좁아지는 제 자신이었습니다.
입력창은 처음부터 거기 있었습니다. 
문제는, 제가 이미 객관식 시험지를 풀고 있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