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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서는 다 쓴 뒤에야 구조가 보인다 – 기획자의 글쓰기에 대하여

WORK/조직과 일

제안서는 다 쓴 뒤에야 구조가 보인다 – 기획자의 글쓰기에 대하여

이 글은 제안서 쓰는 방법을 말하는 글이 아닙니다. 기획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자문하는 질문에 답해보려는 글입니다.

제안서는 왜 다 쓰고 나서야 어떻게 썼어야 했는지가 보일까?

 

제 경우 기획자 초년생 때는 더 심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제안서를 쓰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매거진 에디터로 일했으니 글쓰기는 어느 정도 통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안서는 전혀 다른 종류의 글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잡지 글이 독자의 흥미를 붙잡고 끝까지 데려가는 일이었다면, 제안서는 정해진 요구사항 안에서 상대의 판단을 움직여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고, 중간에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고, 끝에 가서야 '아, 이번 제안서는 이렇게 시작했어야 했구나' 하고 깨닫곤 했습니다.

지금은 제안서와 기획서를 오래 써왔기에 그 정도로 헤매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백지 앞에서 완전히 길을 잃는 일은 줄었습니다.

 

그런데 뒤늦은 깨달음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제안서를 다 쓰고 나면 보입니다.

여기는 더 간결할 수 있었겠다. 이 근거는 앞에서 더 일찍 깔았어야 했다. 이 장표는 임팩트가 약했다.

발표까지 끝난 뒤에는 더 잔인하게 보입니다.

그 문장은 그렇게 말할 게 아니었는데. 그 아이디어는 한 장 앞에서 예고했어야 했는데.

 

글은 늘 끝난 다음에 더 잘 보인다.

제안서도 결국 글입니다.

표와 그래프와 장표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문장이 있어야 합니다.

근거가 있고, 전개가 있고, 설득의 방향이 있고, 마지막에 남아야 할 인상이 있습니다.

잘 만든 제안서는 정보를 나열하지 않습니다. 듣는 사람이 기억할 수 있는 이야기의 모양을 갖습니다.

 

맥락 없는 정보는 오래 남기 어렵습니다.

주기율표의 원소 이름을 전부 외우는 현대인은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저도 못 외웁니다.

반면 어떤 노래의 가사는 그보다 훨씬 길어도 많은 사람이 흥얼거립니다. 이글스의 Hotel California 같은 노래가 그렇습니다.

글자 수로만 보면, 주기율표를 영단어로 나열한 분량은 공백 포함 1,156자입니다. Hotel California의 가사는 공백 포함 1,786자입니다.

사람은 정보의 덩어리보다 맥락과 리듬과 장면을 더 잘 기억합니다.

 

물론 제안서가 노래가 될 수는 없습니다.

클라이언트 앞에서 제안의 슬로건을 중독성 있는 훅처럼 반복할 수도 없고, 호소력 짙은 보컬로 예산안을 설득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원리는 비슷합니다.

사람은 나열보다 전개를 기억합니다.

근거가 쌓이고, 문제가 선명해지고, 해결 방향이 좁혀지고, 어느 순간 , 이래서 이런 제안을 했구나하고 납득하는 흐름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제안서에도 기승전결이 필요합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기승전결은 문학적 장식이 아닙니다.

문제를 발견하고, 맥락을 설명하고, 근거를 쌓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설득의 순서에 가깝습니다.

좋은 제안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방향으로 압력을 만듭니다.

앞 페이지에서 던진 문제가 뒤 페이지의 해결책으로 이어지고, 작은 근거들이 쌓여 마지막 아이디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태를 만듭니다. 상대를 정신적이든, 논리적이든 납득의 방향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쓴 사람과 심사자의 이해 수준이 달라서 중간에 상대가 수건을 던질 수 있습니다.

보통 발표를 따라가지 못하고 볼펜을 돌리기 시작하거나, 맥락과 무관한 메모를 시작하거나, 눈의 초점이 흐려지는 식으로 표현됩니다. 또는 어느 순간 맥락을 놓쳐 지루함을 느끼고 긴장을 놓아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즈음에 한 번은 터져야 합니다.

새로운 관점이든, 실행 가능한 아이디어든, 클라이언트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문제의 이름이든.

그게 없으면 제안서는 잘 정리된 문서에 머뭅니다.

틀린 말은 없지만 오래 남지 않습니다.

듣는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지만, 회의실을 나가면 기억하지 못합니다.

 

쓰다 보면 구조가 흔들린다

문제는 그 구조를 처음부터 완벽하게 알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저도 쓰기 전에 뼈대를 잡습니다.

제안서에서는 그 단계가 더 엄정합니다. RFP를 읽고, 요구사항을 분해하고, 클라이언트의 상황을 추정하고, 근거를 찾고, 그 근거가 실제로 제안의 방향을 지지하는지 확인합니다. 일반적인 글쓰기보다 훨씬 차갑고 엄밀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도 쓰다 보면 처음 세운 구조가 흔들리는 순간이 옵니다.

가장 괴로운 건, RFP의 니즈를 제가 오해했다는 사실을 중간에 발견할 때입니다.

처음에는 콘텐츠의 부족이 핵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콘텐츠 전략을 중심으로 구조를 짜고, 근거를 모으고, 페이지를 쌓습니다.

그런데 쓰다 보면 균열이 생깁니다. 근거가 잘 붙지 않고, 해결책이 겉돌고, 페이지는 많은데 설득의 중심이 약합니다.

 

그럴 때 다시 RFP를 봅니다. 그리고 뒤늦게 압니다.

'고객사가 정말 묻고 있던 것은 콘텐츠 전략이 아니라 고객 접점 전략이었구나.'

혹은 '콘텐츠 부재의 해결을 요구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고객 접점 문제를 해결하려고 콘텐츠 전략을 물어본 것이었구나.'

그 순간은 괴롭습니다. 이미 쓴 페이지가 아까워지고, 시간은 이미 지나갔고, 다시 구조를 부숴야 한다는 암담한 현실이 먼저 눈앞에 펼쳐집니다.

이런 식의 구조 흔들림은 20년 가까이 제안서를 쓰는 제게도 여전히 반복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순간이 정답에 가까워지는 순간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기획은 처음 세운 구조를 끝까지 고수하는 일이 아닙니다.

쓰는 과정에서 처음의 오해를 발견하고, 그 오해를 견디지 못하고 다시 부수는 일에 가깝습니다.

글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생각의 균열을 드러내는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문서는 쌓는 일, 기획은 부수는 일

그래서 제안서는 다 쓴 뒤에야 구조가 보이는지도 모릅니다.

처음에는 재료가 흩어져 있습니다. 근거도 있고, 클라이언트 요구도 있고, 시장 상황도 있고, 하고 싶은 말도 있습니다.

쓸 때는 이 조각들을 하나씩 붙이는 데 집중합니다.

그런데 끝까지 가보면, 그제야 전체의 모양이 보입니다. 어떤 근거는 앞에 있어야 했고, 어떤 장표는 빠져야 했고, 어떤 주장은 더 일찍 예고됐어야 했다는 것이.

 

이건 실패라기보다 글쓰기의 본질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생각을 다 끝낸 뒤에 쓰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쓰면서 생각을 발견합니다.

뼈대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뼈대는 쓰는 동안 검증됩니다.

초안은 정답이 아니라 가설이고, 쓰는 과정은 그 가설을 검증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다시 쓰는 일은 낭비가 아닙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낭비처럼 느껴집니다.

일정은 촉박하고, 페이지는 이미 쌓였고, 팀원들은 지쳤고, 다시 구조를 바꾸자는 말은 모두에게 고통입니다.

저도 그런 말을 꺼낼 때마다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구조 위에 문장을 계속 쌓는 것보다, 잘못됨을 알아챈 순간 부수고 다시 세우는 편이 낫습니다.

문서는 쌓는 일이지만, 기획은 부수는 일이다.

 

이걸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예전에는 이미 쓴 페이지를 버리는 게 너무 아까웠습니다. 사실 지금도 아깝습니다.

다만 이제는 압니다. 버린 페이지가 정말 버려진 것만은 아니라는 걸.

페이지를 쓰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오해했는지 알게 되었고, 어떤 근거가 힘이 없는지 확인했고, 어떤 주장이 설득되지 않는지 배웠습니다.

 

깔끔한 제안서는 원래부터 그렇게 생긴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여러 번 무너졌다가 다시 세워진 단단한 굳은살입니다.

어떤 장표는 사라지고, 어떤 문장은 뒤로 밀리고, 어떤 제목은 제출 마감 마지막 날에야 제자리를 찾습니다.

완성된 구조는 처음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여러 번 틀린 뒤에 남은 것입니다.

 

좋은 제안서의 구조는 목차가 아니라 동선이다

그래서 저는 제안서를 쓸 때마다 여전히 조금 불안합니다.

오래 했다고 매번 확신이 있는 건 아닙니다. 다만 불안을 다루는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이 불안을 없애려 무작정 페이지를 쌓아갔습니다.

지금은 이 불안이 구조를 다시 보라는 신호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페이지는 많은데 설득이 안 된다면, 문장이 부족한 게 아니라 질문을 잘못 잡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근거가 많은데 결론이 약하다면, 자료가 부족한 게 아니라 내러티브가 없는 것일 수 있습니다.

 

좋은 제안서는 많은 것을 담은 문서가 아닙니다. 필요한 것을 필요한 순서로 보여주는 문서입니다.

듣는 사람이 길을 잃지 않게 하고, 마지막에 도착했을 때 왜 이 결론이어야 하는지 이해하게 만들고, 회의실을 떠나서도 뇌리에 남기는 문서입니다

그래서 제안서의 구조는 목차가 아니라 동선에 가깝습니다.

듣는 사람의 생각이 어디서 출발해 어디로 이동해야 하는지를 설계하는 일입니다.

 

이건 블로그 글도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블로그도 대략의 구조를 잡고 시작하지만, 막상 쓰다 보면 예상 못 한 문장이 나옵니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장면이 글의 중심이 되기도 하고, 꼭 쓰고 싶던 문단이 전체 흐름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다 쓴 뒤에야 보이는 것은 문장의 문제가 아닙니다.

처음의 제가 놓친 글의 진짜 방향입니다.

제안서에서 그 방향은 클라이언트의 진짜 질문이고, 블로그에서는 제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입니다.

 

제안서는 늘 다 쓴 뒤에야 어떻게 썼어야 했는지 보입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쓰기 전에 생각을 끝내는 AI가 아니라, 쓰면서 생각의 모양을 확인하는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기획자의 글쓰기는 단순히 생각을 옮겨 적는 일이 아닙니다.

생각이 형태를 갖출 때까지 내가 버틸 수 있는지, 끝까지 걸어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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