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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함, 매너와 미숙함 사이의 그 어딘가 - 직장인 업무 피드백의 함정

WORK/조직과 일

애매함, 매너와 미숙함 사이의 그 어딘가 - 직장인 업무 피드백의 함정

또, 애매한 말을 하고 말았다

저는 또 다시 애매한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팀원이 파일명 끝에 '최종_최최종_진짜끗_final_v2_v3_v5' 정도가 붙은 부담스러운 작업물을 가져왔습니다.

제 눈에는 여전히 손볼 곳이 여기저기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걸 하나하나 말하려니 조금 망설여졌습니다.

이 자리에서 다 짚으면 리뷰가 아니라 끝없는 수정 요청처럼 될 것 같고, 잘못하면 고생한 작업물을 두고 벌어진 직장 내 괴롭힘처럼 보일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가장 큰 것만 짚고 말했습니다.

이런 경우가 더 있을지 걱정됩니다. 핏이 안 맞는 부분이 있는지 검토하시고, 디벨롭해주세요.

 

말하고 나서 바로 생각했습니다.

아, 애매했다.

 

이 말은 얼핏 배려처럼 보입니다.

하나하나 지적하지 않았고, 상대를 몰아붙이지 않았고, 여지를 남겼습니다. 하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조금 난감했을 겁니다.

무엇이 더 문제라는 건지, 어디까지 다시 봐야 하는지, 어느 수준까지 고쳐야 하는지 명확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저는 매너를 지킨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제 미숙함을 부드러운 말로 감싼 것입니다.

 

애매한 말은 부드럽게 들립니다

일을 하다 보면 애매한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한번 봐주세요.', '적당히 정리해주시면 됩니다.', '조금 더 세련되게 가면 좋겠습니다.', '전체적으로 톤을 맞춰주세요.', '이 방향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완전히 틀린 건 아닙니다.', '일단 편하게 한번 잡아보시죠.'

 

이런 말들은 처음 들으면 부드럽게 느껴집니다.

단정적으로 지시하지 않고, 상대에게 여지를 남겨주는 것처럼 들립니다.

누군가를 몰아붙이지 않는 말투이고, 결정권을 강하게 휘두르지 않는 방식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애매함은 종종 매너처럼 보입니다.

 

판교 사투리라는 게 있습니다

업계엔 판교 사투리, 혹은 판교체라 부르는 말들이 있습니다.

누가 가르쳐준 적도 없는데, 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입에서 튀어나옵니다.

그냥 방향이 다르다고 하면 될 것을 핏이 안 맞는다 하고, 의견을 조율하자 하면 될 것을 얼라인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알아들을 만합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일이 밀렸다는 말을 스택이 쌓였다 하고, 안될 것 같지만 한번 물어나 보자는 말을 탭핑해보자 하고, 문제 제기하는 것을 이슈레이징이라고 합니다.

이쯤 되면 예전에 세종대왕모독죄와 한글파괴혐의로 많은 비난을 받았던 '귀여니', '보그'에게 사과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도 씁니다. 회의에서 무심코 튀어나오고, 쓰고 나면 어쩐지 일을 좀 하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듭니다.

이 말들이 다 나쁜 것도 아닙니다. 짧고, 빠르고, 복잡한 상황을 한 단어로 공유하게 해주니까요.

같은 업계 사람끼리는 이만큼 편한 약어도 없습니다.

 

사실 이건 단순한 말버릇이 아닙니다.

언어학에서는 집단방언 혹은 사회방언이라고 하는데 이런 용어를 알아듣는다는 건 나도 여기 속한 사람이라는 신호입니다.

제가 느꼈다는 그 일 좀 하는 사람이 된 기분도 따지고 보면 내부자 인증 혹은 소속의 표시였던 셈입니다.

그런데 안을 묶어주는 그 신호는 동시에 밖을 밀어냅니다.

용어를 아는 사람은 내부자가 되고, 신입이나 고객이나 외부 파트너는 대화에서 한 발 밀려납니다.

더 곤란한 건 어느 순간 용어를 아는 것이 일을 아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핏이 안 맞는다고 말하는 순간엔 뭔가 정리된 것 같지만, 무엇과 무엇의 핏이 안 맞는지는 여전히 비어 있습니다. 목표와 안 맞는지, 톤과 안 맞는지, 일정과 안 맞는지에 따라 해야 할 일이 전혀 다른데도요. 얼라인하자는 말도 누구와 무엇을 맞출지가 빠지면 일이 선명해지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판교체는 일을 빠르게 만드는 언어입니다. 그리고 가끔은, 애매함을 가장 세련되게 포장하는 언어이기도 합니다.

 

모호함은 사라지지 않고 이동한다

애매한 말의 가장 큰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회의에서 명확히 정리하지 않은 말은 그냥 없어지지 않습니다.

다음 단계로 이동합니다. 기획서로, 디자인 시안으로, 개발 일정으로, 보고 문구로.

그 과정에서 누군가가 그 애매함을 해석하고, 임시로 판단하고, 다시 확인하고, 수정해야 합니다.

모호함은 공중에 떠 있다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노동으로 이동합니다.

 

예를 들어 '조금 더 프리미엄하게'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주 쓰이고, 어느 정도는 필요한 표현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프리미엄이 색의 톤인지, 여백인지, 문장의 밀도인지, 이미지의 질감인지, 가격대의 인상인지 정리되지 않으면 실무자는 여러 방향을 동시에 짐작해야 합니다. '조금 더 젊게'도, '심플하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젊다는 게 밝은 컬러인지 빠른 전개인지, 심플하다는 게 덜어내라는 건지 더 고급스럽게 만들라는 건지에 따라 결과물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모호한 말은 편리합니다. 말하는 사람은 빠르게 지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듣는 사람은 그 말을 작업 가능한 단위로 바꿔야 합니다. 확인하는 시간, 다시 묻는 시간, 잘못 이해해서 고치는 시간, 여러 안을 만들어 비교하는 시간, 결정되지 않은 부분을 가정하고 진행하는 부담, 나중에 그 뜻은 아니었다는 말을 듣는 위험.

결국 애매함은 프로젝트 어딘가에 부채처럼 남습니다.

 

고객사보다 조직 내부에서 더 자주 벌어진다

이런 일은 고객사 커뮤니케이션에서만 벌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회사 조직 내부에서 더 자주 벌어집니다.

내부에서는 서로의 맥락을 안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오래 같이 일했고, 비슷한 프로젝트를 해 봤으니 대충 말해도 알아들을 거라 기대합니다. 그래서 말을 줄입니다.

'이거 조금만 정리해주세요. 방향은 아시죠. 지난번 톤으로 가면 됩니다.'

 

그런데 대충 안다고 생각한 맥락이 실제로는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말하는 사람의 머릿속에는 선명한 그림이 있지만, 듣는 사람에게 전달된 것은 흐릿한 안개일 수 있습니다.

더 까다로운 건, 내부에서는 굳이 다시 묻기 어려울 때가 있다는 점입니다.

방금 설명을 들었는데 또 물어보면 못 따라온 사람처럼 보일까 봐, 괜히 일을 키우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그래서 많은 애매함은 질문되지 않은 채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거기서 쌓입니다.

 

매너일 때도 있고, 미숙함일 때도 있다

애매함이 언제나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일에는 처음부터 명확하게 말할 수 없는 순간이 있습니다.

방향을 탐색하는 초기 단계, 아직 답을 정하기보다 가능성을 넓혀야 할 때.

너무 빨리 결론을 내리면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기 어렵습니다. 처음부터 정답을 정해놓고 움직이면, 실무자는 실행자는 될 수 있어도 제안자는 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여지를 남기는 말은 때로 좋은 협업의 출발점이 됩니다.

 

문제는 탐색해야 할 때의 애매함과, 결정해야 할 때의 애매함이 구분되지 않을 때입니다.

초기 논의에서의 애매함은 매너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행 단계의 애매함은 미숙함이 되고, 최종 판단 앞에서의 애매함은 책임 회피가 되기도 합니다.

같은 '한번 봐주세요.'라는 말도 초안 아이디어를 넓히자는 뜻이라면 괜찮지만, 이미 일정이 정해졌고 누군가 구체적인 작업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라면 부족합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여지가 아니라 기준입니다. 무엇을 봐야 하는지, 어디까지 바꿀 수 있고 무엇은 유지해야 하는지, 언제까지 컨펌해야 하는지.

 

사실 애매함이 생기는 이유 중 하나는 결정을 미루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직 확신이 없거나, 책임지고 싶지 않거나, 여러 이해관계자를 모두 만족시키고 싶거나, 혹은 스스로도 무엇이 문제인지 정리되지 않았을 때. 그럴 때 사람은 애매하게 말합니다.

'전체적으로 아쉽습니다.', '방향은 맞는 것 같은데 뭔가 부족합니다.', '우선 디벨롭해보고 다시 보시죠.'

이 말들이 늘 나쁜 건 아닙니다. 정말 더 고민해야 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문제는 이 말들이 결정을 대신할 때입니다.

명확하게 말한다는 것은 상대를 몰아붙이는 게 아니라, 지금 결정할 수 있는 것과 아직 열어둘 것을 나누는 일입니다.

무엇을 확정했고, 무엇은 가설이며, 무엇은 다음 단계에서 검증할지 구분하는 일입니다.

 

좋은 말투와 좋은 요구사항은 다르다

실무에서 종종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부드럽게 말하면 좋은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말투는 중요합니다. 거칠고 무례한 말은 협업을 망칩니다. 하지만 부드러운 말투가 곧 좋은 커뮤니케이션은 아닙니다.

일을 진행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말투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요구사항의 명확성입니다.

 

좋은 요구사항은 상대를 압박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대가 불필요한 추측을 하지 않도록 돕는 말입니다.

무엇을 원하는지, 왜 필요한지,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말입니다.

이런 말은 때로 차갑게 들리지만, 실무의 영역에서는 오히려 친절입니다.

 

'이번 장표는 임원 보고용이라 메시지가 먼저 보여야 합니다. 시각적 장식보다 핵심 판단이 드러나게 정리해주세요.'

이 말은 구체적입니다.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반면 '좀 더 임팩트 있게 가주세요.'는 부드럽지만, 작업자는 어디를 어떻게 고쳐야 할지 다시 해석해야 합니다.

좋은 말투와 좋은 요구사항은 다릅니다. 좋은 커뮤니케이션은 상대가 덜 헤매게 만드는 것입니다.

 

애매함을 줄이는 질문도 실력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애매한 말을 안 들을 수 있을까요.

현실적으로 애매함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애매함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작업 가능한 수준으로 줄이는 일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질문입니다.

상대를 몰아붙이는 질문이 아니라, 상대의 머릿속에 있는 흐릿한 기준을 밖으로 꺼내는 질문입니다.

'조금 더 세련되게'라는 피드백을 들었다면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세련됨은 디자인의 문제인가요, 문장의 문제인가요. 기존 안에서 유지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요. 이번 수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봐야 할 한 가지는 무엇인가요.'

이런 질문은 일을 늘리는 게 아니라 줄이는 질문입니다.

처음에 한두 가지를 더 묻는 것이, 나중에 다섯 번 고치는 것보다 낫습니다.

좋은 실무자는 애매한 지시를 불평만 하지 않습니다.

그 애매함을 줄이는 질문을 던지고, 답을 문서로 남깁니다. 회의에서 흘러간 말을 작업 기준으로 바꿉니다.

그 과정이야말로 잘 보이지 않는 실무 능력입니다.

 

명확함은 예의다

저는 일을 하면서 점점 더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명확함은 예의다.

 

상대를 배려한다는 것은 부드럽게 말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상대가 불필요하게 추측하지 않도록, 같은 일을 여러 번 하지 않도록,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지 알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딱딱하게 정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일에는 탐색이 필요하고, 여지가 필요하고, 서로의 생각이 섞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여지가 계속 여지로만 남아 있으면 일은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어느 순간에는 기준이 필요하고, 결정이 필요하고, 문장으로 남은 합의가 필요합니다.

 

애매함은 때로 매너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무에서는 그 애매함이 누군가의 미숙함을 가리고 있을 때도,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부드러운 말투로 감싼 것일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애매함은 매너와 미숙함 사이의 어딘가에 있습니다.

중요한 건 그걸 비난하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가 필요한 여지이고 어디서부터가 줄여야 할 비용인지 구분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애매한 말을 만나면, 조금 더 묻는 편이 낫습니다.

그리고 저처럼 애매한 말을 하고 말았다면, 다시 돌아가 팀원에게 수정해야 할 기준을 더 말해주는 편이 낫습니다.

 

애매함은 나를 편하게 하고, 명확함은 상대를 지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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