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분 운동이면 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5분도 꽤 길게 느끼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운동 자체가 싫다기보다, 운동을 시작하기 전의 마음이 너무 무겁습니다. 운동복을 갈아입고, 신발을 신고, 몸을 데우고, 숨이 차오르는 시간을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벌써 절반쯤 지칩니다.
운동의 좋은 점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젊은 시절에는 나름 열심히 운동했던 적도 있습니다.
몸이 어느 지점을 넘어가면 오히려 가벼워지고, 숨이 차던 시간이 이상하게 맑아지고, 인내 끝에 작은 환희 같은 것이 오는 순간도 압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그 '하이한 기분'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진 않습니다.
문제는 그곳까지 가는 길도 안다는 데 있습니다.
운동의 환희를 안다는 말은, 그 직전까지의 고통도 안다는 뜻입니다.
몸이 무겁고, 숨은 거칠고, 관절은 무감각해지고,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고생을 하는지 인생을 성찰하는 시간이 먼저 옵니다. 저는 그 시간을 너무 잘 기억합니다.
그래서 더 잘 피합니다.
줄넘기 100번 앞에서 무너졌다
몇 달 전에 운동을 한 번 해보겠다는 큰 결심을 하고, 저녁에 줄넘기를 들고 나간 적이 있습니다.
사실 별생각은 없었습니다. 줄넘기는 단순하니까요.
공간도 많이 필요 없고, 도구도 가볍고, 어릴 때도 해봤고. 본격적인 운동에 비해 마음이 가벼웠던 이유는 여러 가지였습니다.
그런데 100번도 채 못 하고 쓰러졌습니다.
숨은 턱까지 차올랐고, 다리엔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집으로 올라오는 길은 직립보행을 포기한 인간의 그것이었습니다.
네 발로 기었다는 말입니다.
그날 꽤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제가 그래도 체력이 있는 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나이대의 동료들에 비하면 야근도 자주 하고, 철야도 어느 정도 버티는 편입니다.
어릴 때도 단거리보다 장거리 달리기 쪽에 자신이 있었고, 끈기와 인내라면 아직 남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야근을 버티는 체력과 줄넘기를 버티는 체력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회사에서 불합리한 일정에 버티는 능력과, 심장이 뛰고 종아리가 타들어 가는 시간을 견디는 능력은 서로 다른 종목이었습니다.
저는 정신력과 노동 내성을 체력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뒤로 운동은 생각만 했습니다.
생각만요.
핑계는 많았습니다. 일이 많고, 시간이 없고, 날씨가 궂고, 허리가 아프고,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고, 주말에는 그래도 좀 쉬어야 하고. 핑계라는 말이 마음을 찌른다면, 준비된 사유라고 해두겠습니다.
저는 늘 운동하지 않을 이유를 충분히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산책을 시작했다
거창한 결심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소화가 잘 안 되는 날이었습니다.
폭식을 한 것도 아닌데, 가끔 이렇게 몸이 음식을 힘겨워하는 날이 있습니다.
답답했고, 앉아 있어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나갔습니다. 운동을 하겠다는 각오보다는, 이 상태로 계속 앉아 있으면 안 되겠다는 떠밀림에 가까웠습니다.
걷기 시작하니 생각보다 괜찮았습니다. 몸은 편해졌고, 운동까지는 아니었지만 땀 흘리고 나니 상쾌한 기분도 들었습니다.
그 이후로 조금씩 산책을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한 시간 조금 넘게 걸려 5km 정도를 걸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운동이라기엔 약하고, 누군가에게는 산책이라기엔 길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제게는 운동보다 사색의 시간에 가깝습니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을 때 혼자 길을 걷는 것은 오래된 버릇이었습니다.
어떤 문제는 책상 앞에 앉아 있다고 더 잘 풀리지 않습니다.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어도 화면보다 머릿속의 소음이 더 큽니다.
해야 할 결정은 있는데, 앉아 있어도 생각은 앞으로 나가질 않고, 그렇다고 멈추지도 않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의사결정에 필요한 고민의 시간을 산책에 넣어보기로 했습니다.
게으른 직장인스러운 전략입니다. 운동 시간을 만든 게 아니라, 생각하는 장소를 바꾼 셈입니다.
책상 앞에서 모니터를 바라보며 멍하게 고민하는 대신, 걸으면서 고민하기로 했습니다.
고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몸은 움직입니다.
걸으면 생각이 다르게 움직인다
이 방식은 제게 꽤 잘 맞았습니다.
걸을 때는 생각이 조금 다르게 움직입니다.
바람이 얼굴을 때리고, 신호등 앞에서 잠깐 멈추고, 낯선 골목을 지나고, 편의점 앞에서 누군가 담배를 피우고, 늦은 시간까지 불이 켜진 가게를 봅니다.
장면이 바뀌면 생각의 표정도 조금씩 바뀝니다.
사무실 안에서는 한 문제에 너무 깊게 잠기는데, 길 위에서는 그 무게가 조금 덜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주의 회복이나 마인드 원더링 같은 말로 설명할 겁니다.
집중하느라 지친 주의가 외부 환경 속에서 조금 회복되고, 생각은 한곳에 고정되지 않고 느슨하게 떠다닙니다.
하지만 굳이 용어를 붙이지 않아도 체감은 분명합니다.
닫힌 방 안에서 생각하면 문제는 점점 커집니다.
밖에서 걸으며 생각하면 문제는 여전히 문제이지만, 제가 그 안에 갇혀 있다는 느낌은 조금 줄어듭니다.
가끔은 길 위의 사람들이 그 역할을 합니다.
저녁 늦게도 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배달하는 사람, 가게를 정리하는 사람,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 아이 손을 잡고 집으로 가는 사람.
그들을 보며 문득 생각합니다. 아, 저기도 인생이 있구나. 내 머릿속의 문제가 세상의 전부는 아니구나.
조금 감상적이지만, 그런 감상이 때로는 필요합니다.
산책을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문제를 바라보는 제 상태는 조금 바뀝니다.
어떤 날은 걷다가 문장 하나가 떠오르고, 어떤 날은 내일 클라이언트에게 해야 할 말의 순서가 정리됩니다. 어떤 날은 아무 결론도 얻지 못하지만, 적어도 한 시간 동안 의자에 붙어 있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이 남습니다.
운동이라 부르기엔 양심에 걸린다
저는 이것을 운동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정의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양심상으로는 약간 머뭇거리게 됩니다.
체력을 키우겠다는 목표보다, 생각을 굴리겠다는 목적이 더 크니까요.
건강을 위해 걷는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많은 잡념을 데리고 나갑니다.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하고 합리화합니다.
그리고 이 합리화는 꽤 쓸 만합니다.
10년 가까이 운동을 거의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헬스장을 등록하고, 식단을 짜고, 주 5회 운동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변신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어르신들 말씀의 통계적 자명성도 너무 명백하거니와, 그런 계획은 너무 크고, 큰 계획은 쉽게 무너집니다.
반면 산책은 작습니다. 운동복을 갖추지 않아도 되고, 기구도 필요 없습니다.
집에 있던 그대로, 회사에 있다면 출근한 차림 그대로, 단순히 문을 열고 나가면 됩니다.
물론 이마저도 매일 하지는 못합니다.
비가 오면 안 나가고, 너무 더워도 안 나가고, 일이 늦게 끝나면 포기합니다.
현실적으로 주 3번 정도.
그래도 운동을 전혀 하지 않던 사람이 일주일에 세 번, 한 시간 넘게 걷는다면, 적어도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은 아니지 않을까요.
그래서 하나는 알게 됐습니다.
운동은 꼭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생활 안에 들어갈 틈을 찾는 문제일 수 있다는 것.
저에게 그 틈은 생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어차피 고민해야 할 일이 있다면, 책상 앞에서 굳어 있지 말고 길 위에서 고민해보자.’ 그 정도의 타협이 제게는 맞았습니다.
운동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장소를 책상에서 길 위로 옮겼습니다.
그랬더니 몸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전보다 건강해졌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줄넘기 100번을 못 하던 사람이 갑자기 건강한 중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예전보다 조금 덜 멈춰 있습니다.
소화가 안 될 때, 머리가 복잡할 때, 결정해야 할 일이 머릿속에서 엉킬 때, 이제는 가벼운 마음으로 문을 엽니다.
운동은 여전히 싫습니다. 하지만 산책은 할 수 있습니다.
걷는 동안 저는 건강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너무 무겁게 가라앉지 않도록 몸을 움직이는 사람에 가깝습니다.
이것이 10년 가까이 운동을 피하던 사람의 중년 운동기입니다.
대단한 결심도, 극적인 변화도 없습니다.
5km 정도 걷고, 조금 생각하고, 돌아옵니다.
땀을 조금 흘리고, 다리가 조금 뻐근하고, 머릿속은 아주 조금 가벼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정도면, 오늘의 운동으로 충분하다고 우깁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