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는 화장품과의 거리감이 애매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일로는 가까웠지만, 생활로는 멉니다.
예전에 대기업 코스메틱 브랜드 프로젝트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제품 상세페이지도 만들었고, 브랜드 메시지도 고민했고, 촬영 현장에서 제형의 질감과 점성을 어떻게 보여줄지 포토그래퍼와 함께 머리를 싸매기도 했습니다.
화장품은 빛을 참 예민하게 탑니다. 너무 번들거리면 기름져 보이고, 너무 매트하면 촉촉함이 죽습니다.
크림은 크림대로, 세럼은 세럼대로, 에센스는 에센스대로 표면의 광과 흐름이 다릅니다.
그걸 사진 한 장으로 보여주려면 조명도, 배경도, 손의 각도도 꽤 중요했습니다.
심지어 여성용 제품이었지만, 소비자 입장을 이해해보겠다고 직접 발라본 적도 있습니다.
흡수감이 어떤지, 밀리는지, 끈적이는지, 향이 어느 정도 남는지.
솔직히 말하면 업계에서 쓰이는 표현을 많이 베꼈습니다.
화장품 업계에는 업계에서 통하는 사회방언 같은 말들이 있습니다.
쫀쫀하다, 산뜻하다, 피부결을 정돈한다, 광채가 돈다, 밀착된다, 무너짐이 적다.
처음 그 문장들을 접했을 때는 약간 외국어 같았습니다.
매거진에서 처음 일할 때 패션 잡지의 남성 그루밍 특집을 읽으며 문장을 익히던 시절이 떠올랐죠.
그러니까 저는 화장품을 완전히 모르는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일로 배운 것과 생활에서 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일상에서 저는 화장품을 거의 쓰지 않습니다. 겨울에도 로션을 잘 바르지 않습니다.
피부가 건조하면 건조한 채로, 버즘이 피면 버즘이 핀 채로 회사에 나오는 종류의 중년입니다.
누가 보면 자기 몸에 너무 무심한 사람이고, 실제로도 대체로 맞습니다.
제가 가장 많이 경험해본 남성화장품이 대중목욕탕에 비치되어 있는 미스 쾌남 스킨, 로션이라면 설명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건 좀 너무한 것 아닌가'
거울을 보니 피부가 피곤해 보였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제가 피곤해 보였고, 얼굴이 그 사실을 성실하게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회사 근처 올리브영에 들어갔습니다. 대단한 결심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로션이라도 하나 사볼까, 뜻밖에 몇 년쯤 회춘한 것처럼 보이게 해줄 영약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오랜만에 방문한 올리브영에는 큰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품의 종류라는 관문
제가 기억하는 남성용 화장품의 세계는 단순했습니다.
스킨, 로션, 올인원. 조금 신경 쓰면 선크림. 더 신경 쓰면 비비크림 정도. 물론 이것도 이미 제게는 과하게 복잡한 세계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매대는 달랐습니다.
진정, 장벽, 탄력, 미백, 안티에이징, 슬로우에이징, 스킨부스팅, 모공, 트러블, 톤업, 수분, 시카, 레티놀, 나이아신아마이드, 세라마이드, 펩타이드. 제품들은 저마다 다른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서 있었습니다.
저는 로션 하나를 사러 왔을 뿐인데, 피부를 운영하려면 시, 도급의 행정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직업병이 도져서 제품들이 매대에서 외치는 메시지를 훑어보니, 피부는 그냥 건조하거나 번들거리는 것이 아니랍니다.
장벽이 약해지고, 수분이 부족하고, 탄력이 떨어지고, 색소가 침착되고, 모공이 넓어지고, 턴오버가 느려지는 복합 시스템을 관리해야 한다고 합니다.
시, 도급의 행정력이라고 했는데, 그것도 안일한 판단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작은 행성급 생태계의 운영자가 되어야 하나 봅니다.
성분명이라는 관문
히알루론산. 레티놀. 나이아신아마이드. 세라마이드. 펩타이드. PDRN. 엑소좀. 글루타치온. 마데카소사이드.
저는 그저 로션 하나 사러 들어왔는데, 어느 순간 Nature Chemistry에 실린 논문의 초록을 읽는 느낌입니다.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채 단어만 훑었는데도 화학자들의 지성 앞에 고개가 조아려집니다.
이 성분들이 어떤 농도와 제형에서 의미가 있는지 저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다만 확실한 건, 제가 업계에서 일하던 시절의 언어와 지금의 코스메틱 언어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촉촉하다, 산뜻하다, 환해 보인다, 피부결이 좋아 보인다는 말이 앞에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말은 흔적 기관처럼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위에 성분의 언어가 두껍게 덮였습니다.
제품 패키지에는 더 이상 소비자가 느낄 감각 정보만 있지 않습니다.
성분명, 원료명, 작용을 암시하는 표현, 때로는 분자 구조처럼 보이는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예전에는 "촉촉함"이 팔렸다면, 지금은 "어떤 성분이 피부에 어떻게 작용하여 촉촉해지는가"까지 가야 팔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화장품은 의약품이 아닙니다. 그 선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언어의 구조는 점점 의약품을 닮아갑니다.
관리, 회복, 개선, 장벽, 재생, 노화 지연.
피부를 예쁘게 보이게 하는 제품이라기보다, 관리 가능한 생물학적 프로젝트로 대하는 느낌입니다.
제품의 언어를 모르는 소비자가 되어버렸다
문제는 저 같은 사람입니다.
한때는 코스메틱 브랜드 프로젝트를 하며 그 세계의 문장을 배운 적이 있었지만, 10여 년 뒤 생활 소비자로서의 저는 매대 앞에서 완전한 초보였습니다.
일 할 때는 제품의 텍스처 표현과 메시지를 고민했는데, 정작 제 얼굴에 바를 제품 하나를 고르려니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피부만 늙은 게 아니었습니다. 화장품의 언어를 읽는 능력도 같이 늙었습니다.
매대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이건 장벽에 좋다 하고, 저건 탄력에 좋다 하고, 이건 진정에 좋다 하고, 저건 미백 기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 피부가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건조한 건지, 탄력이 문제인지, 장벽이 무너진 건지, 그냥 잠을 덜 자서 얼굴이 낡아 보이는 건지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제게 필요한 것은 세럼이 아니라 수면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수면은 매대에서 팔지 않습니다.
한때 콜라겐이 유행하던 시기가 생각납니다.
먹는 콜라겐, 바르는 콜라겐 크림같은 제품말이죠. 그런데 나중에 검증해보니 바르는 콜라겐은 분자가 커서 보습막 역할 정도라고 하고, 먹는 콜라겐은 검증된 기존 스킨케어보다 우선순위가 높은 것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유행했던 많은 성분들이 비슷합니다. 어떤 건 의미가 있고, 어떤 표현은 과장이 섞였고, 어떤 건 그냥 보습만 잘해도 비슷해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더 쉽게 의심합니다. '그냥 바세린이나 베이비로션을 발라도 되는 것 아닐까.'
또 그렇게만 보기엔 요즘 제품들이 너무 진지하게 발전한 것 같기도 합니다.
결국 저는 아무것도 사지 못했습니다. 정확히는 못 골랐습니다.
로션 하나 사려고 들어갔다가, 안티에이징과 피부 장벽과 PDRN과 엑소좀 사이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피부가 아니라 제 성분 문해력의 노화를 확인하고 나온 셈입니다.
화장품이 이렇게 말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겠죠. 소비자가 똑똑해졌고, 그만큼 브랜드도 구체적으로 말해야 하니까요.
한편으론 불안을 파는 것이기도 할 겁니다.
노화, 건조, 장벽 손상, 색소. 이런 단어들은 단순한 고민이 아니라 관리해야 할 위험처럼 느껴지고, 성분명의 길이만큼 더 깊은 곳에서 작용할 것 같으니까요.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화장품이 과학의 언어를 빌릴수록, 저 같은 사람은 조금 더 멀어집니다.
저는 아직 현대 화장품의 언어라는 장벽 앞에서 서성이고 있습니다.
피부는 여전히 푸석하고, 머릿속에는 히알루론산과 PDRN이 떠다닙니다.
사실 이번 방문에서는 제품의 종류와 성분명에 압도당해, 뭘 질문해야 할지조차 떠오르지 않아 직원분을 피해 다녔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잠을 설치고, 회사에서 고민을 거듭하고, 주말의 일상에서도 번민한 끝에,
마침내 직원분에게 물어볼 질문의 문장을 조형해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뭘 바르면 되나요?"
아마 그 질문이 가장 빠를 겁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