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객사와 메시지를 주고받다 보면 가끔 이상한 신분 감각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고객사 담당자가 제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팀장님 입장도 고려하겠습니다.”
아주 정중한 말입니다. 틀린 표현도 아닙니다. 상대도 충분히 예의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저는 잠깐 다른 시대에 와 있는 기분이 듭니다.
“경의 딱한 처지, 내 어찌 모르겠는가. 깊이 헤아릴 것이니라.”
물론 고객사 담당자가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닐 겁니다.
그분도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정중한 표현을 골랐을 겁니다.
다만 고려하겠다는 말은 상대의 처지를 헤아리겠다는 뜻인 동시에, 최종 판단은 이쪽에서 하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문장이 아니라 구조입니다.
저는 회사 안에서는 이사이고, 프로젝트에서는 총괄 책임자입니다.
팀원들에게는 방향을 잡고, 일정을 조율하고, 고객사와 논의한 내용을 정리해주는 사람입니다.
나이도 어느덧 많아졌습니다. 고객사 실무자보다 열 살, 스무 살 가까이 많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고객사와 메신저 창 앞에서는 사정이 달라집니다.
나이와 직급과 경력이 잠시 뒤로 물러납니다. 그 자리에 결재선이 들어옵니다.
제가 프로젝트를 알고, 맥락을 알고, 실무를 알고 있어도 최종 결정권은 제 손에 없습니다.
저는 설명하고, 설득하고, 이해를 구하고,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말을 고르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순간에는 바짝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일정이 흔들렸거나, 전달이 꼬였거나, 고객사 입장에서는 충분히 불쾌할 만한 일이 생겼을 때입니다.
그럴 때 저는 이렇게 씁니다.
“송구합니다. 말씀 주신 부분은 다시 확인해보겠습니다.”
조금 더 난처한 상황이면 문장은 더 낮아집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바로 정리해 공유드리겠습니다.”
정말 어려운 상황이면 더 이상 현대어만으로는 부족해집니다.
“미처 살피지 못했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감히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습니다만, 현재 기준으로는 기존 방향을 유지하는 편이 적절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쓰고 나서 다시 읽어보면 거의 상소문입니다.
그런데 이건 농담이 아닙니다. 읽는 사람이 피식 웃으며 기분 풀어 주기를 기대하는 말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지금은 웃을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먼저 몸을 낮추는 말입니다.
제가 잘못한 몫이 아주 조금 있고, 구조적으로 어쩔 수 없었던 몫이 있고, 일정과 조건이 얽힌 몫이 있더라도, 일단 이 순간에는 제 쪽에서 낮아져야 합니다.
'송구합니다.'는 '죄송합니다.'보다 조금 더 낮습니다. '면목이 없습니다.'는 그보다 더 납작합니다.
'불찰입니다.'는 책임을 제 쪽으로 당겨오는 말입니다. '사료됩니다.'는 '생각합니다.'보다 조심스럽습니다.
내 의견이 맞다기보다, 이 정도로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하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회사 메신저에서 이런 말은 장식이 아닙니다. 그건 일종의 자세입니다.
상대방의 기분을 풀기 위한 말이지만,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기 위한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무게를 인정하는 말입니다. 지금 이 상황이 가볍지 않다는 것, 상대가 불편할 수 있다는 것, 그래도 이 일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제가 먼저 낮아지겠다는 뜻입니다.
회사 메신저의 말투는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단순히 말을 예쁘게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 안에는 정보, 감정, 책임, 위계, 일정, 예산, 결재선, 상대의 오늘 기분까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말도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전혀 다른 옷을 입습니다.
같은 팀원에게는 간단합니다.
ㅇㅇ, ㅇㅋㅇㅋ, 넹, 오키, 굿.
이 정도면 충분할 때가 많습니다. 굳이 문장을 완성하지 않아도 됩니다.
서로의 맥락을 알고 있고, 이 말이 무례가 아니라 빠른 반응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팀 안에서는 말이 조금 헐렁해도 관계가 받쳐줍니다.
하지만 타 부서나 고객사와 대화할 때는 달라집니다.
"네", "넵", "네, 확인했습니다", "확인 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뜻은 비슷합니다. 모두 알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온도는 다릅니다.
'네'는 차갑고, '넵'은 조금 가벼울 수 있습니다. '네, 확인했습니다'는 대화가 닫히는 느낌이 있고, '확인 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는 아직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았지만 책임을 받아든 사람처럼 보입니다.
회사 메신저에서 짧은 답장은 짧은 답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작은 인사고, 작은 자세고, 작은 위치 선언입니다.
그리고 저만 메신저 창 앞에서 문장을 고르는 것도 아닙니다. 고객사 담당자 역시 자기 위에 보고해야 하고, 내부 의견을 조율해야 하고, 상사의 판단을 받아야 합니다. 그쪽은 그쪽의 말투를 고르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이 글은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따지는 글은 아닙니다. 다만 회사 메신저에서는 나이보다 결재선이 먼저 도착한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경력보다 승인권이 앞서고, 친절보다 책임의 방향이 먼저 읽힙니다.
부탁을 할 때도 그렇습니다.
그냥 해주세요라고 하면 명령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문장은 부드러운 옷을 입습니다.
“급한 건 아닙니다만, 오늘 중으로 가능하실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시간 되실 때 한번 봐주실 수 있을까요.”
여기서 '급한 건 아닙니다만'은 대체로 급합니다. 정말 급하지 않으면 굳이 급하지 않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시간 되실 때'도 비슷합니다. 상대의 시간을 배려하는 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시간을 되도록 빨리 만들어달라는 아주 정중한 요청일 때가 많습니다.
거절할 때는 더 어렵습니다. ‘안 됩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건 너무 직선적입니다. 회사에서 직선적인 말은 대체로 위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 돌아갑니다.
"현재로서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내부 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방향성은 이해했습니다만, 일정상 부담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말들은 모두 사회생활의 완충지대입니다. 문장을 부드럽게 만들고, 책임의 모서리를 조금 둥글게 만듭니다. '안 된다'는 말이 갑자기 떨어지면 다칠 사람이 생기니, 말 주변에 쿠션을 두는 것입니다. 직장인은 가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는 능력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런데 고객사와 에이전시 사이에서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있습니다.
해야 할 말은 해야 합니다. 일정상 어렵다고 말해야 하고, 요청 범위가 달라졌다고 말해야 하고, 어제 확정된 방향이 오늘 바뀌면 영향이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말을 그대로 던지면 상대는 방어적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먼저 낮춥니다.
“송구합니다. 제가 미처 살피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다만 일정 영향은 함께 검토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 순서는 중요합니다.
먼저 낮아진 뒤에 말합니다. 먼저 책임을 일부 끌어안고, 그다음 조건을 설명합니다. 먼저 상대의 감정을 인정하고, 그다음 현실을 꺼냅니다. 이건 말의 기술이기도 하지만, 에이전시가 프로젝트를 끌고 가기 위해 익히는 생존 기술에 가깝습니다.
업무는 대부분 말처럼 깔끔하게 흐르지 않습니다. 일정은 밀리고, 요구사항은 바뀌고, 방금 확정된 것이 다시 검토되고, 검토된 것이 다시 보류되고, 보류된 것이 갑자기 오늘 중으로 필요해집니다. 이때 메신저는 단순한 연락 도구가 아닙니다. 작은 협상 테이블이 됩니다.
각자 자기 사정이 있습니다. 고객사는 내부 보고와 결재선이 있고, 에이전시는 제작 일정과 인력 배분이 있습니다.
디자이너는 더 이상 일정과 리소스가 없고, 기획자는 사방으로 흩어져버린 전후 맥락을 유지해야 하고, 개발자는 방금 들은 변경사항이 시스템 전체를 흔드는지 계산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서 누군가는 말해야 합니다.
“말씀 주신 방향 충분히 이해했습니다만, 일정과 구현 범위를 함께 고려하면, 우선순위를 조정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긴 문장이지만 속뜻은 단순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 죽어요.”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쓰지 않습니다. 회사는 문명사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문명사회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것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말로 번역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물론 가끔은 지칩니다. 그냥 말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이건 어렵습니다. 안 됩니다.”
“이건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일정상 불가능한 요구입니다.”
“이 방향은 어제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바꾸시면 저희는 오늘 집에 못 갑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씁니다.
“말씀 주신 방향 확인했습니다. 다만 기존 논의 내용과 일정 영향을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어, 내부 확인 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문장을 쓰고 나면 마음속에서는 작은 번역기가 작동합니다.
“살려주세요.”
그렇다고 메신저 말투를 모두 없앨 수는 없습니다. 회사가 사람으로 이루어진 곳인 이상, 일은 내용만으로 굴러가지 않습니다.
감정도 있고, 체면도 있고, 오해도 있고, 피로도 있습니다. 말투는 그 모든 것 사이에 놓인 질기고 얇은 완충재입니다.
오늘도 저는 메신저 창 앞에서 문장을 고릅니다.
너무 낮추면 우스워지고, 너무 세우면 건방져 보입니다. 너무 짧으면 차갑고, 너무 길면 무겁습니다. 너무 솔직하면 다치고, 너무 돌려 말하면 아무도 못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적당히 낮고, 적당히 부드럽고, 적당히 책임을 지되, 적당히 빠져나갈 문도 남겨둔 문장을 씁니다.
“제 불찰로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말씀 주신 내용 기준으로 다시 정리해보겠습니다. 일정이 조금 더 필요한 점은 너른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잠시 후 고객사에서 답이 옵니다.
“네, 팀장님 입장도 고려하겠습니다.”
저는 그 문장을 읽고 조용히 답장을 고르기 시작합니다.
윤허를 기다리는 사람의 문장을 골라야 할 시간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