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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오스크 앞에서 인간의 지능이 내려간다

LIFE/일상의 기록

키오스크 앞에서 인간의 지능이 내려간다

오랜만에 회사나 집이 아닌 매장에서 햄버거 하나를 먹고 싶었을 뿐입니다.
 
새로운 메뉴에 도전하려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늘 먹던 햄버거를 먹고 싶었습니다.
이름도 알고, 맛도 알고, 세트로 먹을지 단품으로 먹을지도 대충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문이 어려워졌습니다.
 
예전 같으면 계산대 앞에서 점원에게 무슨 버거 라지 셋트요, 한마디하고 카드 결제하면 끝날 일이었는데, 요즘은 어딜 가도 키오스크가 있습니다. 편리하라고 만든 기계였을 겁니다. 사람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메뉴판이었으면 상소문 같았을 다양한 메뉴를 스크롤하면서 고를 수 있고, 주문 실수도 줄일 수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기엔 그렇습니다.
 
그런데 키오스크 앞에 서니 그게 맞는지 의심스러워집니다.
첫 화면부터 만만하지 않습니다. 저는 늘 먹던 햄버거를 찾고 싶은데, 화면에는 추천 메뉴와 프로모션 메뉴가 가득합니다. 새로 나온 메뉴, 할인 세트, 시즌 한정 메뉴, 앱 쿠폰 안내 같은 것들이 먼저 저를 맞이합니다.
 
화면은 제 마음을 모릅니다. 어쩌면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먹고 싶은 메뉴보다 가게가 팔고 싶은 메뉴가 먼저 나옵니다. 저는 이미 배고픈 사람인데, 키오스크는 저에게 마케팅을 시작합니다.
 
메뉴 버튼도 편하지 않습니다. 어떤 매장은 메뉴가 왼쪽에 있고, 어떤 매장은 위쪽에 있습니다. 오른손잡이인 저는 왼쪽 끝에 있는 메뉴를 누를 때마다 살짝 몸을 비틀게 됩니다. 메뉴가 위쪽에 있는 경우도 당황스럽습니다. 저는 제가 평균보다 큰 편이라고 생각해왔는데, 키오스크 앞에서는 확신이 흔들립니다. 요즘 사람들은 전부 180cm가 넘는 걸까요.
메뉴를 누르려고 팔을 위로 뻗는 순간, 저는 햄버거를 주문하는 건지, 어디선가 저를 부르는 소리에 손을 번쩍 들어 대답하는 순간인지 헷갈립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습니다.
 
다음 난관은 제가 찾는 햄버거가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분명 이 매장에 있는 메뉴입니다. 예전에 분명히 먹어봤습니다. 그런데 화면에는 없습니다. 추천 메뉴를 넘기고, 세트 메뉴를 넘기고, 인기 메뉴를 넘기고, 한참 스크롤을 해야 합니다.
 
그때 뒤에 사람이 섭니다.
 
그 순간부터 상황이 달라집니다. 아까까지는 메뉴를 고르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뒷사람의 시간을 써야 합니다. 손가락 하나를 움직일 때도 신중해집니다. 스크롤이 너무 느리면 민망하고, 너무 빠르면 원하는 메뉴를 지나칠까 봐 불안합니다.
 
그냥 첫 화면에 있던 추천 메뉴를 먹을 걸 그랬나.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저는 분명 먹고 싶은 햄버거가 있었는데, 뒤에 사람이 서는 순간 취향이 약해집니다.
 
마침내 메뉴를 찾습니다. 안도할 시간은 없습니다. 키오스크는 바로 다음 질문을 합니다.
세트로 변경하시겠습니까.
네, 세트로 하겠습니다.
사이드는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감자튀김이요.
음료는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콜라요.
사이즈를 변경하시겠습니까.
아니요.
추가로 필요한 메뉴가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이 메뉴는 어떠세요.
아니요. 필요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저는 이제 결제하고 싶습니다. 뒤에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방금 감자튀김과 콜라를 고르는 과정에서 이미 상당한 소셜 에너지를 잃었습니다. 여기서 너겟을 고민할 여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키오스크는 쉽게 보내주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결제 방법을 고르라고 합니다. 신용카드, 간편결제, 앱 결제, 모바일 쿠폰, 포인트, NFC 결제. 많은 선택지는 편리함처럼 보이지만, 급할 때는 함정처럼 느껴집니다. 저는 아이폰을 쓰는데, NFC는 되는 카드가 따로 있고 안 되는 카드가 따로 있습니다. 앱 결제는 휴대폰을 열고, 앱을 찾고, 로그인까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뒤에 사람이 서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장 익숙한 선택을 찾습니다.
 
카드 직접 결제.
 
분명히 있을 겁니다. 눈앞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습니다. 화면은 넓고, 버튼은 많고, 제 눈의 초점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뒷사람의 불편한 숨소리가 들린 것 같습니다.
미끄러지는 손을 진정시키며, 겨우 카드 직접 결제를 찾습니다. 카드를 꽂습니다. 결제가 됩니다.
 
끝난 줄 알았습니다.
 
키오스크가 다시 묻습니다.
멤버십 적립하시겠습니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적립 안 해도 됩니다. 저는 살고 싶습니다.
다음 질문이 나옵니다.
영수증을 받으시겠습니까. 번호표만 받으시겠습니까.
영수증은 필요 없습니다. 번호표만 주세요. 아니, 그냥 알아서 주세요. 저는 이제 이 대화에서 빠져나가고 싶습니다. 제발 저를 놓아주세요.
 
마침내 결제가 끝납니다.
 
주문번호가 나옵니다. 종이가 인쇄되어 나오는 시간도 하세월입니다.
저는 번호표를 들고 한 발 물러납니다.
뒷사람에게 미안함을 표시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오래 걸린 것 같기 때문입니다.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봅니다.
 
제 뒤에는 중학생쯤 되었을까 싶은 여학생이 서 있습니다.
살해당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래도 미안한 건 미안한 겁니다. 저는 작게 목례를 합니다. 상대는 별생각 없어 보입니다.
어쩌면 저보다 키오스크를 훨씬 잘 다룰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제가 겪은 모든 고난을 세 번의 터치로 통과할 수도 있습니다.
 
대기 번호판 앞에 섭니다. 그제야 한숨이 나옵니다.
햄버거 하나를 주문했을 뿐인데, 조금 더 늙은 기분입니다. 홀로 맹수를 잡아야 하는 어떤 부족의 성인 의식을 마친 것 같습니다.
메뉴를 찾고, 옵션을 고르고, 결제 수단을 선택하고, 적립과 영수증을 거절하는 동안 저는 점점 작아졌고, 소형화에 비례해 지능도 내려갔습니다. 
 
햄버거는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번호판 앞에서 기다리며, 방금 지나온 화면들을 생각합니다.
추천 메뉴와 프로모션 메뉴, 찾기 어려운 햄버거, 끝없이 이어지는 추가 질문, 여러 결제 방법, 멤버십 적립, 영수증 선택.
그리고 생각합니다.
 
이거 대체 누가 만든 거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