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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도 이야기가 필요하다

WORK/조직과 일

일에도 이야기가 필요하다

회사 분위기가 가볍지 않습니다.


누가 크게 말하지 않아도 압니다. 회의실의 말수가 줄고, 점심시간의 웃음소리가 잦아들고, 퇴근 무렵의 표정이 옅어집니다. 

작은 에이전시는 경기에 민감합니다. 일이 많을 때는 숨이 차고, 일이 줄어들 때는 공기가 먼저 무거워집니다.
이런 시기에 이야기를 말하는 건 조금 한가한 소리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당장 필요한 것은 매출과 다음 프로젝트입니다. 이야기가 월급을 주지는 않습니다. 

회사가 어려울 때 필요한 것은 결국 숫자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숫자만으로는 사람이 오래 버티기 어렵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일이든 생활이든 어느 정도는 이야기가 되어야 삶의 질이 올라간다고 믿는 편입니다. 

거창한 서사나 드라마처럼 극적인 사건이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시작했고, 무엇을 통과하고 있으며, 이 시간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프로젝트도 그렇습니다. 제안, 기획, 갈등, 수정, 납품이 차례대로 흘러갑니다. 

그 과정이 힘들어도 흐름이 보이면 남는 것이 있습니다. 나중에는 그때 정말 고생했지,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힘들었던 회의도 장면이 되고, 예상치 못한 문제도 에피소드가 됩니다. 그러면 일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통과한 시간이 됩니다.

 

모든 일이 매번 의미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일은 반복되어야 하고, 어떤 일은 말없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그 안정적인 반복이 삶을 지켜주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 경우에는, 반복만으로는 오래 버티기 어렵습니다.
특히 같은 프로젝트를 아주 오래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야기가 흐려집니다. 

시작은 오래전에 지나갔고, 끝은 매년 비슷합니다. 문제는 반복되고, 해결도 반복됩니다. 숙련은 쌓이지만 새 장면은 줄어듭니다. 

일을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더 기계적으로 해낼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점이 사람을 지치게 합니다.


제가 맡은 팀은 10년째 비슷한 프로젝트를 하고 있습니다. 

고객사를 잘 알고, 업무 흐름에 익숙하고, 예상되는 문제도 미리 압니다. 

어디서 막히는지, 누가 어떤 말을 꺼내는지, 마지막에 무엇을 다시 고치게 되는지도 대충 그려집니다. 

이 숙련은 분명 자산입니다. 하지만 숙련이 어느 순간 형벌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매년 같은 돌을 밀어 올리는 사람처럼, 우리는 익숙한 문제를 다시 만나, 익숙한 방식으로 수습하고, 익숙한 피로를 안은 채 다음 해로 넘어갑니다.


일이 힘든 것과, 일이 아무 이야기도 남기지 않는 것은 다릅니다.
일이 힘들어도 지나온 시간이 보이면 버틸 수 있습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무엇을 배웠고, 어떤 문제를 풀었으며, 어떤 기준이 새로 생겼는지 알 수 있으면 고생도 남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면, 사람은 점점 말이 줄어듭니다. 

사람은 힘든 일을 못 견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지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을 더 오래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그래서 회사에는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회사의 이야기는 멋진 구호가 아닙니다. 

발표자료 첫 페이지에 들어가는 문장도 아닙니다. 

진짜 필요한 이야기는, 우리가 이 일을 왜 계속하고 있는지, 이 반복을 통해 무엇을 쌓고 있는지, 내년에는 무엇이 조금 달라질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설명에 가깝습니다. 

그런 설명이 없으면 사람은 일을 과업으로만 느끼게 됩니다. 

해야 하니까 하는 일, 매년 해왔으니까 올해도 하는 일. 

그렇게 일해도 틀리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오래 지속되면 사람 안의 무언가가, 열정이든 의지든, 조금씩 마릅니다.

 

사내 행사나 모임도 비슷합니다. 회식이든 워크숍이든, 그것이 시켜서 참석하는 일정이 되면 피로가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함께 웃어넘겼고 어떤 시간을 공유했는지 확인하는 자리가 되면, 그것은 작은 에피소드가 됩니다. 

회사 안의 이야기는 거대한 비전에서만 생기지 않습니다. 작은 회의, 작은 성공, 작은 농담, 함께 넘긴 어려운 일정에서도 생깁니다.


문제는 그것을 아무도 이야기로 묶어주지 않을 때입니다. 

프로젝트는 지나가고, 보고서는 쌓이고, 메신저에는 수많은 대화가 남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무엇을 통과했는지 말하지 않으면, 그 시간은 업무 기록으로만 남습니다. 

해냈지만 남지 않는 시간. 바빴지만 기억되지 않는 시간. 저는 그것이 사람을 지치게 한다고 느낍니다.


회사가 어려울 때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은 조심스럽습니다. 

그래도 저는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어려울 때 필요합니다.
좋은 시기에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일이 굴러갑니다. 

하지만 어려운 시기에는, 지금 우리가 무엇을 지나고 있는지 함께 말해야 합니다. 

그래야 버티는 일이 단순한 버티기로만 남지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거창한 감동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지금 어느 장면을 지나고 있는지 정도는 함께 알고 싶습니다. 

지금은 버티는 장면인지, 다시 정리하는 장면인지, 새로운 방향을 찾는 장면인지, 오래된 방식을 내려놓는 장면인지. 

그 정도의 이름 붙이기만 있어도 사람은 조금 덜 외롭습니다.


제가 맡은 팀원들은 단순히 10년째 같은 프로젝트를 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한 고객사의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을 오래 지켜본 사람들이고, 같은 흐름의 변화와 피로를 몸으로 겪은 사람들입니다. 

그 시간을 그냥 반복으로만 부르면 너무 아깝습니다.

 

이야기가 당장 회사를 구하지는 못할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자기 일을 아무 의미 없는 반복으로만 느끼지 않게 할 수는 있습니다. 

작은 프로젝트라도 끝났을 때 무엇을 배웠는지 남기는 것. 

오래 버틴 사람들의 시간을 가볍게 넘기지 않는 것. 

시켜서 하는 모임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함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작은 자리를 만드는 것.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은 원래 힘듭니다. 회사도 늘 재미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일이 힘든 것과, 일이 아무 이야기도 되지 않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가 왜 버티고 있는지.
무엇을 지나고 있는지.
이 반복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적어도 그 정도는 함께 말할 수 있어야, 같은 돌을 다시 밀어 올리는 내일도 조금 덜 외로울 것 같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