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의 자각
블로그 스킨을 만들고, 첫 글도 발행하고, 새벽에 다시 한번 둘러봅니다.
만드는 동안에는 안 보이던 것이 다 끝나고 나면 보입니다.
이거... 내가 이전에 만들었던 다른 웹사이트들이랑 좀 비슷한데?
20여 년 일하면서 웹사이트 구축 프로젝트를 많이 했습니다.
제가 UX 기획자로, PL 혹은 PM으로 제작에 참여 했던 웹사이트는 다양합니다.
대기업 웹사이트만으로 한정해도 삼성전자, 현대카드/캐피탈, LG생활건강 더페이스샵(북미), 현대로템, 현대자동차그룹 등이 있고요
하나하나 다 다른 프로젝트였고 클라이언트도 다르고 시기도 달랐는데 다시 보면 형제처럼 닮아 있습니다.
지금 이 블로그까지요.
격자에 정확히 정렬되어 있고, 좌우가 대칭이고, 여백이 균일하고, 색은 무채색.
다 안전해 보이고 비슷해 보입니다.
이번 개인 블로그를 만들면서 한 번도 이전 기업 사이트들처럼 만들자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결과물은 그쪽에 한 발 걸치고 있습니다.
awwwards.com 키드의 생애
연식이 드러나는 회고이나,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라는 영화가 있었죠.
저의 경우 2009년 awwwards.com이 문을 열고 나서부터 약 6년 정도 awwwards.com 키드였습니다.
매일 방문해서 후보작, 수상작을 훑었고 동경해왔습니다.
awwwards.com 수상작들의 장점은 그냥 이미지 몇장 얹은 레퍼런스가 아니라 제가 실제로 이용해 보고, 유저 플로우를 따라가보고, 심지어 코드까지 열어볼 수 있는 웹사이트라는 것입니다.
맛볼게 너무 많았죠. 디자이너로서, 콘텐츠 기획자로서, UX 설계자로서 제 모든 직무 정체성을 만족시키는 환상적인 놀이터였습니다.
압도적인 비주얼로 화면을 가득 채우는 사이트가 있습니다.
반대로 이미지 한 장 없이 움직이는 ASCII 코드만으로 사이트 전체를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사이트도 있습니다.
기획자인지 디자이너인지 모를 누군가의 감각 하나만으로 화면이 어마어마한 무게를 가집니다.
그런 사이트들을 보면서 늘 생각했습니다.
언젠가는 나도 저런 걸 만들어보고 싶다.
17년이 지났는데 저는 아직 그런 사이트를 만든 적이 없습니다.
시도가 없지는 않았다
변명을 하자면, 클라이언트 요청으로 실험적인 시안을 그려본 적은 여러 번 있습니다.
좀 극단적으로 좀 의외성 있게 좀 튀게.
그런데 거의 다 중간에 기각됐습니다.
"사용성이 떨어진다"
"소비자 학습이 필요하다"
"이 동선으로는 구매 전환이 안 일어난다"
"정보를 빠르게 못 찾는다"
기각 사유는 다 맞는 말이었습니다.
실제로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내비게이션은 사용자가 원하는 정보를 빠르게 가져다줍니다.
상세 페이지까지 내려가서 결제 전환이 효율적으로 일어나려면 의외성보다 익숙함이 답입니다.
저도 그걸 압니다. 그래서 시안을 그릴 때 이미 한 번 거르고, 컨펌에서 한 번 더 깎이고, 결국 가장 안전한 안이 선택됩니다.
20여 년간 그 강을 건너온 손은 이제 큰 글자를 그릴 때도, 비대칭 그리드를 잡을 때도 자동으로 절제합니다.
물론 한 선배의 조언처럼 이건 약점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언어를 깊게 익혔다는 뜻이고, 시장에서 그 언어는 진짜 가치가 있고, 클라이언트는 그걸 원해서 저에게 일을 맡겼습니다.
다 맞는 말입니다. 다 맞는 말인데.
그런데 왜 답답하지
다 맞는 말인데 새벽에 제 블로그를 보면서 답답합니다.
이번 FRME 블로그를 만들면서 새삼 보였습니다.
GNB 메뉴가 15px, 섹션 타이틀이 26px, 썸네일 카드 타이틀이 16px, 본문이 16.5px.
가장 큰 글자와 가장 작은 글자의 차이가 1.7배입니다.
모든 게 중간 크기입니다.
화면을 봤을 때 눈이 어디에 멈춰야 할지 모릅니다.
정종철, 박휘순, 오지헌, 오정태, 송영길이 나란히 서있는 격입니다.
(물론 이건 믿을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경우에 해당합니다)
다 중요하다고 외치는 화면은 결국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화면이 됩니다.
정적으로 보이는 화면의 진짜 문제는 움직임이 없어서가 아니라 강약이 없어서입니다.
비대칭이 없어서도, 색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위계의 낙차가 없어서입니다.
이건 제 손에 익은 언어로는 만들기 어려운 종류의 화면입니다.
awwwards.com에서 본 사이트들이 가지고 있던 그것.
그게 없어서 답답한 거였습니다.
개인 블로그까지 안전하게 만들었다는 사실
가장 아쉬운 건 이겁니다.
기업 사이트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칩시다.
임원의 취향, 사용성, 전환율, 법무 리스크 다 이유가 있었으니까요.
근데 개인 블로그는 누가 시킨 일이 아니었습니다.
기각할 임원도 없고, 깎을 컨펌도 없고, 책임질 클라이언트도 없습니다.
마음껏 시도해도 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안전하게 만들었습니다.
서커스 같은 비대칭도 없고, 압도적인 타이포그래피도 없고, 이미지 한 장 없이 화면을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그런 시도도 없습니다.
작은 모션 몇 개. 그게 제가 한 시도의 전부입니다.
이전 저였다면 안 했을 선택들이긴 합니다. 그래도 awwwards.com에서 본 사이트들에 비하면 조약돌만큼의 일탈입니다.
20여 년이 손에 그렇게 깊이 박혔습니다.
자유로운 자리에서도 자유롭게 못 만듭니다.
그래서 이 글은 위안이 아닙니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이 글이 자칫 실패해도 그래도 괜찮다로 끝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한 가지 언어를 잘 구사한 것이다. 그것도 가치다. 이제부터 시도하면 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위로의 흐름은 너무 편합니다.
직장인에게 아픔은 성장통이 아니라 고객사 임원이 참여하는 월요일 오전 회의의 전조증상입니다.
저는 그냥 아픕니다.
동경해온 사이트들의 발끝에도 못 갔고, 개인 블로그에서조차 그 발끝을 못 디뎠고, 다음 프로젝트에서도 컨펌의 강을 건너면서 또 깎여나갈 겁니다.
이 글은 그 갈증에 대한 것입니다.
다음 프로젝트에서 시안을 그릴 때 조금 더 큰 글자, 조금 더 비대칭인 그리드, 조금 더 의외의 여백을 시도해보겠다는 말을 적어두고 싶지만
솔직히 이전에도 시도했고 거의 다 깎였습니다. 다음에도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이전에는 시안이 깎일 때 어차피 효율과 사용성이 우선이지라며 빨리 받아들였습니다.
다음에 깎일 때는 마음 한쪽에 작은 짜증이 남을 것 같습니다.
그 짜증이 다음 시안을 한 번 더 시도하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사실 가장 두려운 점은 이제는 제가 실무자가 아니라 관리자라는 것 입니다.
그래서 저는 실무자로 남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이 블로그를 만들었습니다.
아마 이전처럼 대기업 웹사이트 구축 실무는 못해도, 제 개인적인 프로젝트는 지속할 수 있을 겁니다.
아직 필드에 있는 플레이어들에게
"왜 내가 만든 사이트는 다 비슷하게 생겼지?"라고 느끼는 PM이나 디자이너가 있다면
축하드립니다. 한 가지 언어를 잘 구사하게 됐다는 신호일 겁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게 끝이 아니라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내가 동경해왔던 다른 언어가 있다면, 그게 자꾸 떠오른다면,
지금까지의 언어가 실패했다는 게 아니라 이제 두 번째 언어를 배워야 할 때라는 뜻입니다.
저는 20여 년 동안 첫 번째 언어를 익혔습니다.
두 번째 언어는 이제 막 시작입니다.
이번 블로그는 그 시작 지점이고, 보시다시피 아직 어색합니다.
언젠가 awwwards.com까지는 못 가더라도
제가 만든 사이트를 둘러보면서 이번엔 좀 다른데?
라고 느낄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고 있습니다.
끝.